고아 30여명 보살펴 사회 진출시킨 비구니 스님

입력 2019-03-29 10:37:51

대구 황룡사 상룡 스님, 4명은 대학까지 공부시켜

황룡사 창건주 상룡 스님(오른쪽)과 상좌 현종 스님이 대웅전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김동석 기자
황룡사 창건주 상룡 스님(오른쪽)과 상좌 현종 스님이 대웅전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김동석 기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당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는 뜻이다.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어떤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자유롭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자리잡은 전통사찰 황룡사 마당 가장자리. 수령 40년쯤 보이는 목련 나무에 하얀 꽃이 만개해 있다. 목련 나무 아래에 노승의 비구니 스님 한 분이 바람결에 떨어지는 꽃송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절에서 키운 애들이 사회에 나가 잘 살고 있겠지…." 스님의 얼굴엔 평온함과 걱정스러움이 살짝 교차하고 있다.

황룡사 창건주인 상룡 스님은 올해 출가 70년이 넘는다. 속가 나이로 77세다. 스님은 오갈데 없는 아이를 거두어 반듯하게 키워 사회에 내보내는 '고아의 어머니'로 불린다. 스님이 절에서 손수 키운 아이들만 무려 30여 명 된다. 어린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잠재우고 하는 등 평생을 인재불사에 전념했다. 아이들에게 유치원, 초·중·고 학교도 보내주었다. 대학까지 공부시킨 아이도 4명이나 된다. 일본에 유학시켜 복지학 교수가 된 아이도 있다.

"황룡사 일대는 옛날 달동네예요. 절 대문은 항상 열어놓고 지냈어요. 어느날 대문 안쪽에 보자기에 싼 아기가 놓여있기도 하고 또 어느날 법당에 아기가 놓여 있기도 했어요. 불쌍한 아기를 거두는 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했어요."

대구에서 스님이 아이를 잘 키운다는 소문이 퍼졌다. 한창 애를 돌볼 때에는 절에 20명의 아이가 있기도 했다. 절에는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로 북적댔다. 손수 죽을 끓여 먹이고 보살들이 갖다준 간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워주었다. 아이들 때문에 법당 기도도 쉽지 않았다. 스님은 아이들에게 '인과응보'를 최우선 덕으로 심어줬다. 평소 선과 악의 행실이 훗날 서로 상반된 업보를 가져온다는 가르침이다. 스님은 아이들 모두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고 바르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성인이 된 아이들은 명절이나 초파일에 스님을 찾아와 고마움을 전한다.

스님이 고아들을 보살핀 것은 자신의 어릴적 힘든 삶과 무관하지 않다. 스님은 속가 나이 8세에 출가했다. 해인사 삼선암에서 은사인 복만 스님 아래서 자랐다. 15세에 사미니계, 18세에 보살계를 수지하고 1970년 해인사 승가대학 대교과를 졸업했다. 1977~1979년 청도 용천사 주지를 엮임한 후 줄곧 황룡사에 주석하고 있다. 스님은 고아들을 보면 자신의 어려운 유년시절이 생각나 아이들을 거두게 됐다는 것.

스님은 고령의 나이지만 검박한 삶을 살고 있다. 평소 보살이 시주한 밥풀 한알도 중요시 여기고 남은 음식은 모두 먹는다. 그릇은 식당에서 버린 것을 가져와 쓰고 물은 빗물을 받아 사용한다. 또 법회 공양물 준비도 손수 하고 법당 바닥 닦기, 화장실 및 마당 청소, 꽃밭 가꾸기 등도 직접 한다.

스님은 1985년부터 매월 양로원 및 홀몸노인에 공양물과 공양금을 후원하고 2000년부터 군종불교와 생명나눔 실천본부에도 후원하고 있다. 상좌인 현종 스님과 함께 미술심리, 명상, 전시, 문학 등 문화포교활동도 펼치고 있다. 현종 스님은 "은사인 상룡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시는 분"이라며 "주변 인연들에게 보이지 않는 수없는 베품과 보시행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해인사 말사인 황룡사는 60여 년 전에 건립된 전통사찰이다. 그런데 주택재개발 사업으로 철거 위기에 처해 있다. 사찰 소장의 목조 석가모니불좌상 1구와 산신도 등 불화 5점은 문화재청에 문화재등록 신청을 해놓았다. 상룡 스님은 사찰 성보물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는 방안을 세워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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