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제4회 시니어 문학상 논픽션 부문 당선작]⑨김영숙 열망

입력 2019-03-18 10:55:54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일러스트 전숙경(아트그룬)

나는 지화영의 긴 말이 끝나자 후들후들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문지방을 넘어 방 밖으로 나왔다. 몸을 가눌 수가 없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미 신경세포가 모두 죽어버린 느낌뿐이다. 내 등 뒤에서 지화영의 슬픈 목소리가 또다시 귓전을 때린다.

"하지만 진짜 미안해. 그때 그 순간은 정말로 사랑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휘청거리는 두 다리를 옮기며 술집 밖으로 나오자 먼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그때야 내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있다는 걸 알았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있는 이 사건, 과연 누구의 죄일까. 사랑보다 진실보다 가난이 죄인 거 같다. 나는 이렇듯 결론짓고 하늘에서 눈을 뗀 다음 천천히 공장을 향해 걸어갔다. 이제 야학교엔 갈 수 없다. 곧 작업이 시작될 시간이므로. 새벽이 걷혀가는 하늘은 동이 트는지 먼 곳에서부터 밝아오는 거 같았다.

7. 이별

그해 가을도 다 지나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겨울 밤, 나는 야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공장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눈은 엄청 쏟아져 내렸다. 나는 목도리를 코 위까지 올려 두르고 옷에 묻은 눈을 수시로 털어내며 간신히 공장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잠시 공장 문 앞에서 신발을 툭툭 턴 다음 머리에 쌓인 눈을 고개를 세차게 몇 번 흔들어 흩날려버렸다. 그 시간에도 계속 눈은 멈추지 않고 내리는 중이었다. 하얀 눈발 때문인지 주변이 그다지 어둡지는 않았다. 나는 무심코 막 공장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서려다 묘한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군가 서있다. 덩치가 약간 큰 남자로 보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 눈꼬리를 올리고 자세히 살펴봤다. 남자가 분명했다.

"누구?"

나는 그때야 목소리를 냈다. 엉거주춤 다가오는 남자, 뜻밖에 서강우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밤 야학교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궁금한 마음에 여러 사람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런 그가 지금 이곳에 우두커니 서있다.

"웬일?"

내 물음은 왜 이 시간에 공장 앞에 서있느냐는 뜻이었다. 대답이 없다. 서강우는 한참동안 내 앞에서 말없이 나를 주시하더니 이내 내 손목을 잡아끌고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뭐야? 왜 이래?" 나는 엉겁결에 서강우에게 끌려 발을 내디디며 떨리는 음성으로 물음을 던졌다. "잠깐이면 돼. 할 얘기가 있어."

그는 숨을 헐떡이며 애원하는 어조로 말했다. 순간 의외로 그의 손길이 따사로웠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괜스레 마음도 후들후들 떨렸다. 생각지도 않던 감정이 내 가슴 끝에서 해일처럼 일어났다. 순간, 그가 나를 확 잡아당겨 가슴에 꼭 끌어안았다. 얼떨결에 나는 아얏, 소리도 내지 못한 채 그의 가슴에 안겨 거친 숨을 내뿜었다. 그의 뺨이 내 입술 언저리를 스쳐 지났다. 연이어 뜨거운 호흡이 내 전신을 마비시켰다. 이미 조금은 예감했던 서로의 시작이었다. 겉으로 표현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서강우의 눈빛을 읽고 있었다. 나도 별로 거부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던 탓에 묘한 자존심을 앞세우며 차일피일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거 뿐이었는데 다행히 그가 먼저 다가와 줘 나는 못이기는 척 안겼는지도 모른다. 가슴을 짓눌러오는 격한 감정은 온 누리를 평화롭고 아늑하게 느끼게 했다. 하얀 눈 더미가 싸늘함을 뒤로하고 훈훈하게 적셔온다. 백색의 고운 눈발이 끝없이 휘날리며 코언저리에서 부드럽게 녹아내린다. 잠시 후,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 그를 내 몸에서 떼어냈다. 서강우는 말없이 나를 뒤로했다. 서운한 생각이 잠깐 내 가슴을 휩쓸고 지났다. 저만큼 멀어져가는 서강우의 등 뒤에서 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밀 지켜줘."

나는 뜨끔 뒷일이 걱정됐다. 서강우가 슬쩍 뒤돌아보고 다시 앞을 향해 천천히 걷는다. 평소 말수가 적은 서강우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밤이었고 더욱이 눈보라치는 날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발길을 돌렸다. 서강우, 그의 모습은 서서히 사라져버린 후였다.

또다시 전신이 후끈 달아올랐다. 내 귓불에 대고 서강우가 속삭이던 "사랑해."가 아직도 지워지지 않은 까닭이다. 유독 밤하늘이 맑고 곱게 보였다.

꿈과 희망에 벅차있던 내 마음은 이제 사랑까지 얻어 세상을 전부 독차지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사람에겐 늘 좋은 일만 있을 수는 없는 법인 거 같았다. 코피를 쏟으면서까지 열심히 했던 내 공부는 빛을 봤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영원히 내 곁에 머물지 않았다. 결혼을 약속했던 서강우가 군에 입대한 뒤 나는 사뭇 들뜬 마음으로 이제 학생을 뛰어넘어 야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한몫 거들고 나섰다. 드디어 중학교조차 가지 못했던 내가 선생이 된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거듭되는 검정고시 합격을 거쳐 나는 그토록 꿈에 그리던 정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난의 가시밭길이 있었던가. 눈치를 보며 유독 눈엣가시로 여기던 공장의 감독과 여러 시선들, 나는 한껏 주눅이 들어 허리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늘 기죽어 살아왔다. 거기에 시기질투는 또 어떠했는가. 어느 때는 책이 찢겨져 나를 황당하게 만들었고 모두들 쑥덕거리며 손가락질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나는 의식하지 않고 꿋꿋한 심정으로 오직 한길만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현재는 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그 어느 날인가는 정규학교에서 제대로 된 모습으로 교단에 설 날이 반드시 있으리라 여기며 나는 잠시도 멈추지 않고 더욱 열심히 공부에 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첫 번째 휴가를 나왔다는 서강우, 그의 연락을 받고 나는 부리나케 발걸음을 옮겼다. 마음이 자못 들떠 몸은 이미 붕붕 떠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드디어 약속한 지하다방으로 들어서자 벌써부터 애절한 음색의 팝송이 내 귓전을 파고들었다. 평소 라디오에서 많이 들었던 '탐 존스'의 '딜라일라'였다. 서강우는 언제 왔는지 먼저 한곳에 자리를 하고 앉아있었다. 나는 얼른 그 앞으로 다가가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 잔이 서강우와 내 앞에 각 자 한잔씩 놓였다. 나는 무심코 내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한 모금 홀짝 마신다음 다시 접시위에 내려놨다. 서강우는 전혀 마실 생각이 없는 듯 계속 커피 잔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일 있어요? 심각해 보이는데."

"......"

서강우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답답한 심정에 재차 다그쳤다.

"말해 봐요, 무슨 일인데?"

"며칠 후에 나 월남으로 떠나." 그때야 서강우가 입을 열었다.

"네에?"

나는 화들짝 놀라 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갑자기 왜?"

나는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다시금 확인 차 물음을 던졌다.

"어쩔 수 없이 다녀와야만 될 거 같아. 결혼식은 다녀온 다음 하기로 해. 지금으로선 형편이 안 되잖아."

침울한 목소리로 이렇듯 말하는 서강우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보였다.

"형편이 무슨 필요예요. 있는 그대로 하면 되는 거지."

내가 울먹이며 말했다.

(3월26일 자 시니어문학상 면에는 논픽션 당선작 '열망' 마지막 회가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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