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 건담에서 처음 나왔던 흑역사라는 말을 이제는 우리 주변에서도 많이 쓰고 있다. 이 말을 쓰는 게 옳은지 그른지는 미뤄두고, 일단 나에게 흑역사는 책 한 권을 쓸 만큼 많다. 모르긴 몰라도 지금도 내 어두운 역사는 갱신 중이다. 되돌아보면, 풋내기 비평가 시절에 내가 말머리에 인용구를 달았던 것 또한 흑역사의 한 부분이다. 평론이나 소논문 맨 앞에 단테, 니체, 로브그리예가 쓴 글을 한 줄 슬쩍 받아쓰기하는 일.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달아오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지적 공동체에 그 대가들과 함께 속한 것처럼 잘난 척한 거다. 본문은 또 얼마나 장황했나.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도 아니고, 한 말을 살 붙여서 또 하는 논리는 엉망이었다. 시간여행을 할 수만 있다면, 그때 내 책상머리에 글 하나를 써서 붙여놓고 돌아오고 싶다. "1절만 해라."
작가 정재완도 원본이 있는 글을 곧잘 인용한다. 하지만 애당초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걸 찍어내고 쓰고 붙인다. 그렇게 끌어들여 펼쳐 보이는 레터링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다. 각각의 작품은 그것이 품은 내용과는 일대일로 상응하고, 형식은 도안의 디자인 그 자체다. 내용과 형식은 서로를 떠받치며 새로운 맥락을 만든다. 우리는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한 대구미술관 특별전에서도 그런 콘텍스트를 새롭게 발견한다. 그가 가지고 온 출처는 일제강점기 저항시인 이육사의 시구다. 내가 미술관에서 작가와 마주쳤을 때 글자의 출처가 뭔지 물어봤다. 부끄럽게도, 나는 그게 이육사의 시로부터 따온 문장인지 몰랐다. 이 글이 리뷰 형식을 품어야 한다면 난 자격이 충분치 않다.
다행스럽게도 정재완은 탁월한 작가인 동시에, 훌륭한 이론가며 교육자다. 내가 몰랐던 사실을 쉽게 설명해주었다. 고로 이 글은 작가노트에 대한 인용문으로 봐도 된다. 이 작품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의 레터링은 한 눈에 봐도 강철과 무지개라는 두 낱말이 좌우로 무게와 힘의 균형을 이룬다. 그가 이런 한글 작업을 벌인 건 오래 됐다. 정재완의 서체는 감각이 남다르다. 그는 한글의 시각적인 조형인 원 사각 선 점을 어떤 부분은 대담하게, 또 어떤 부분은 다소곳이 뜯어 맞춘다. 작가는 이육사의 시 구절 아홉 개를 골라서 설치하려했는데, 딱 하나를 눈에 띠게 강조하는 쪽으로 수정했다고 한다. 나머지 작품도 보고 싶은데, 대구 중구 북성로에 있는 264작은문학관에 가면 그 원류를 찾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윤규홍 (갤러리분도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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