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담]'덩어리 시간'을 오롯이

입력 2019-02-20 19:30:00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이숙현 동화작가·구미금오유치원 원장

아노… 가늘지도 굵지도 않은 촌장님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미야자키현에 자리한 목성(木城) 그림책마을 북카페는 천장이 꽤 높았습니다. 함박눈 내린 듯 백발 촌장님의 새하얀 콧수염이 옴짝, 얇은 입술이 달싹, 말들이 펼쳐졌습니다. 23년 전 아름다운 이곳에 그림책마을 시공간을 꾸리면서 품은 첫 마음이 「강아지똥」(길벗어린이) 「넉 점 반」(창비) 그림책 세계와 맞닿아 있더란 이야기였지요. 일본어를 모르는 까닭에 들리는 말이라고는 '아노'와 '이영경 상' '정승각 상'뿐. 그러나 일본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에 정성을 다하는 황진희 번역가와 함께한 자리였어요. 덕분에 '아노'와 '아노' 사이, 모스 부호 같은 무수한 말들의 뜻을, 고운 목소리의 우리말로 생생히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가슴 뛰게 아름다운 우리말

어떻게 그 말들을 여기 다 옮길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가슴 뛰게 했던 낱말들을 불러봅니다. 생명, 존중, 사랑, 그림책, 감정, 자연, 살아있는 이미지, 정신, 고향, 울림, 힘, 어린이의 세상, 지그시 우려낼 수 있는 시간, 몰입, 덩어리 시간. 아이들과 더불어 여러 해 살면서 꿈꾸고 바라왔던 마음들을 꿈틀거리게 하는, 살아있는 말들이라니!

놀라운 말들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습니다. '아기의 보들보들한 살결' 같은 한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느낌을 최대한 살린 작품으로 「강아지똥」을 꼽고, 따듯한 울림이 한지를 통해 번져 나오는, 정말 멋진 그림책으로 「넉 점 반」을 부를 때, 바다 건너 산속 조용한 그곳에 감탄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출렁였습니다. 한국 작가 그림책 원화 전시회와 작가와의 만남 자리를 하루 앞둔 밤이었습니다.

깊은 밤, 달빛 따라 길 건너 전시장에서 만난 그림책 원화는 깜짝 놀랄 만큼 새로웠습니다. 빛깔과 기운이 펄펄 살아 있었습니다. '생명의 끝이 다른 생명의 시작'이 되고, '모든 생명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촌장님 말씀 때문인지, '덩어리 시간'을 누린 덕분인지, 눈앞의 그림 한 장면 한 장면이 엄청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한국에서 여럿이 함께, 꼭 다시 마주하고픈 마음이 들 정도로….

새 봄 만나게 될 소중한 인연

한 해 중 가장 짧은 달이자, '수료'와 '졸업'으로 '시작'과 '마무리'가 맞물려 있는 2월. 새 봄 만나게 될 소중한 인연들, 유치원 졸업하고 이제 곧 초등학생이 될 여덟 살 아이들의 얼굴을 헤아려봅니다. 응원의 마음 담뿍 보내면서요. 언제 이렇게 자란 건지, 중학교 입학을 앞둔 큰아이의 새로운 날들 가늠해보며, 새삼 목성 그림책마을에서 살뜰히 누린 덩어리 시간과 함께 시 한 편이 떠오릅니다.

나는 이제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다/ 나는 나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 내가 뭘 할 때 행복한 아이인지/ 뭘 잘할 수 있는 사람인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뭘 하면서 살면 나도 내 주변도/ 함께 즐겁게 살 수 있을지/ 내 속에 어떤 꿈들이 있는지/ 학교 공부는 나에 대해 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나에 대해 내가 아는 게 이렇게도 없다니!/ 나는 나에 대해 알고 싶다/ 나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알고 싶다// 나는 지금 진짜 공부에 대해 묻고 있는 중이다(김선우 시집 「아무것도 안 하는 날」 가운데 '나는 이제 정말로 공부가 하고 싶다' 시 전문. 그림책산책(책방)에서 이 시를 낭독해주신 이화정 작가님, 고맙습니다;)

다가올 새 봄 앞두고 당신은 무엇을 하고 싶으실까요? 지금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든 덩어리 시간을 오롯이 누려보세요! 사랑하는 아이들에게도 선물처럼 덩어리 시간 안겨주시고요. 내가 '나'로 스미는, 아름다운 덩어리 시간들이 새싹처럼 여기저기 솟아나는 봄! 꿈꾸며 마음 보탭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