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명대 한문교육과 교수
풍로에는 국이 끓고 처마에는 참새 소리 湯沸風爐雀噪簷(탕비풍로작조첨)
마누라는 씻고 빗고 찬에 간을 보고 있네 老妻盥櫛試梅鹽(노처관즐시매염)
해야 높이 뜨건 말건 명주 이불 포근하니 日高三丈紬衾暖(일고삼장주금난)
내사 마 알 끼 뭐고, 잠이나 더 자자꾸나 一片乾坤屬黑甜(일편건곤속흑감)
목은(牧隱) 이색(李穡: 1328-1396)은 고려 왕조의 최후를 장식했던 실로 엄청난 시인이었다. 현재 남아 있는 그의 한시가 줄잡아 6000수에 이르고 있으니, 실제로 지은 시가 몇 수인지는 짐작조차도 할 수가 없다. 게다가 목은은 고려말기 역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비중이 매우 큰 정치가였고, 성리학의 토착화에 앞장을 섰던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어디 그 뿐이랴. 그는 시대의 흐름을 좌지우지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을 길러낸 교육자이기도 했다. 고려왕조에 일편단심의 충성을 다 바친 정몽주, 이숭인, 길재 등이 그의 제자임은 말할 것도 없고, 새 왕조 건설에 앞장을 섰던 정도전, 하륜, 권근 등도 목은을 스승이라 불렀으니까.
위의 작품은 바로 그 목은이 지은 즉흥시 가운데 하나. 어느 날 아침 부스스 잠에서 깨어나 보니, 풍로 위에서 보글보글 국이 끓고 있다. 후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집안에 온통 가득 차 있다. 처마 위에서는 짹짹거리는 참새들의 노래 소리가 경쾌하다. 어느 틈에 일어나서 세수를 하고 빗질까지 마친 아내는 요리를 하는데 여념이 없다. 멀리서 봐도 그런 아내가 참 미쁘다. 해는 이미 서너 길 정도 어지간히 하늘 높이 떠올라 있다. 후닥닥 일어나도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덮고 있는 명주 이불이 너무 포근하다. 에라 이, 모르겠다. 일단 잠이나 더 자고 보자꾸나.
"백설(白雪)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험하구나)/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夕陽)에 호올로(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목은이 남긴 유일한 시조다. 한시 속의 화자는 팔자가 늘어진 사람인데, 시조 속의 화자는 석양에 홀로 서서 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고 있는 사람이다. 얼핏 보아도 완전 딴판이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 왜 그럴까? 왕조 교체기의 막장 드라마 같은 상황,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따라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제자들끼리 시퍼렇게 칼을 겨누는 참으로 냉혹한 정치현실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바람에 포근한 명주 이불 뒤집어쓰고 마음껏 잠을 자고 싶었던 꿈은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세상 사람들아, 쓸데없이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잠이나 실컷 자고 보자꾸나. 허허 그것 참, 잠이나 실컷 자고 보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