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그날은 '대구 시민위안의 밤'이었다. 텔레비전은 커녕 라디오만 몇 집에 있던 시절, 그나마 낮에만 방송하던 그런 때었다. 공회당과 대구역을 같이 쓰는 광장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들었다. KBS대구방송국 전속가수 박재란과 대구출신 가수 도미, 손시향의 실물을 보겠다고 모여들고, 2군 사령부 군악대 연주를 감상하겠다고 모여들고, 장소팔 고춘자의 만담을 듣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그 때는 극장 쇼도 라디오로 중개를 자주하던 시절이었으니 가수, 군악대, 코메디언이 직접 나오는 시민위안의 밤은 대구 시민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큰 행사가 아닐 수가 없었다.
빨리 군악대 연주가 보고 싶었다. 지루한 전반이 끝나고 군악대가 등장하였다. 국방색 버스가 광장에 도착하자 단원들이 차례차례 절도있게 하차했다. 재빨리 헤쳐모여 무대 아래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군악대라면 단연코 '수자 폰'이다. 거대한 달팽이의 속살을 빼어 놓은 듯한 모양새를 갖춘 악기로 민간인들의 악단에서는 볼 수없는 악기다. 1854년 미국 워싱턴에서 태어난 수자는 10세 때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음악을 시작했다. 16세 때 극장 전속 관현악단의 수석을 지내다가 26세 때 미국 해군 군악대 악장으로 취임한 음악수재다. 수자가 만든 악기는 군악대에 필수다.
연주 시작 전 '스타마치(관악)'가 울려 퍼졌다. 해군군악대장을 지낸 이교숙이 작곡한 이노래는 군인들의 행사가 시작되면 임석한 장군에게 경례할 때 연주되는 음악이다. 이 날은 대구시민들 전부를 장군으로 모신다는 의미로 이 음악을 서비스한 것 같았다. "밤빠라 밤빠라 바 빰빠바". 이 소절을 들으면 심장이 뛴다.
2군사령부 군악대가 처음에는 트럼펫이 앞서 수자 작곡의 '성조기여 영원하라', '워싱턴 포스트 마치'와 '보기대령행진곡' 등의 신나는 행진곡들을 연주했다. 대구시민들의 흥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어서 흐느끼는 색소폰 소리와 함께 비 내리는 고모 령', '단장의 미아리 고개', '연분홍 치마'가 울려 퍼지자 시민들은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지휘자도 아예 객석으로 돌아서서 지휘봉을 흔들었다.
비가 오기 시작했다. 군악대장은 성재희의 '보슬비 오는 거리'를 연주했다. 너와 내가 하나 된 음악회가 우중에 펼쳐지고 있었다. 보슬비는 억수로 변했다. 사람들은 광장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군악대는 계속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나는 폭우 속에서도 연주를 하는 군인들이 멋있어 더 보고 싶기도 하고 또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나를 잡아당기고 있어 연주가 끝날 때 까지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이윽고 밤 광장은 텅텅 비었고 나만 어느 건물 처마 밑에 홀로 서 있었다.
텅 빈 광장에서 우중(雨中)의 연주는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원수의 적을 향해 밀어나가자/굳세인 우리 앞엔 가랑잎이다/겨누는 조준 속에 몰려드는 ./우리는 무찌른다, 추한 가슴들/우리는 보병이다, 국군의 기둥/우리는 보병이다 국군의 자랑/우리는 보병이다, 국군의 자랑."
'보병의 노래'가 마지막으로 연주되고 공연은 끝났다. 예의 국방색 버스가 광장안으로 들어 왔다. 군악대원들이 처음처럼 각을 세워 승차를 했다. 마지막으로 군악대장이 차 입구로 올라가려다 좌향좌를 하였다. 처마 밑에 있는 소년에게 거수경례를 하였다. 버스가 떠난 땅바닥에는 도회(都會)의 오색 네온이 물감처럼 풀어져 빗물에 흐르고 있었다.
전 대구적십자병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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