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 살고 싶은 대구

입력 2019-01-25 06:30:00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전영권 대구가톨릭대 지리교육과 교수

필자는 대구에서 태어나 줄곧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대구를 제대로 알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 중 한 사람이다. 대구에 대한 좋지 않은 얘기를 들을 때면 이성을 차리기 전에 흥분부터 되는 거 역시 대구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거 대구경북이 잘나가던 시절에는 타 지역민들로부터 적잖은 시샘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잘나간 것은 일부 기득권층에 한정될 뿐 보통의 대구 사람은 득은 못 보고 욕만 함께 얻어먹기 일쑤였다.

사실 대구는 한국사에서는 다루어지지 않는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많은 곳이다. 대구 지역에 대한 학문을, 이른바 지역학의 범주로 본다면, 학창 시절 우리가 배워온 한국사는 중앙학이지 지역학이 아니다. 중앙의 권한이 절대적인 현재의 사회제도에서 지역학은 늘 무시되어 왔다.

이제 우리 지역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약 2만 년 전 후기 구석기시대 이래 인류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삶의 터전이 지속되어온 대구는 오늘날 인구 250만에 이르는 거대 도시로 발전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신문왕 9년(689년)에 왕은 통일신라의 수도를 경주에서 대구로 천도하려고 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대구로의 천도가 성립되지 못한 구체적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새로운 천도지로 대구를 택했다는 것은 삶터로서의 대구가 매우 길지였다는 얘기다. 아마도 경주가 지진이 자주 발생하는 탓에 자연재해가 거의 없으면서도 넓은 평야를 가진 대구가 천도지로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려 현종 때는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팔만대장경(1236∼1251년 제작)보다 200년가량 앞서 제작을 발원한 호국의 초조대장경이 팔공산 부인사에 보관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 총사령관인 사명대사가 대구 팔공산 동화사에 주둔하면서 승병사령부를 지휘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군 이여송과 함께 참전한 풍수 전문가 두사충은 대구가 좋아 이곳에 둥지를 튼 이래 지금까지 많은 그의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한편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휘하 부대 좌선봉장이었던 사야가(沙也可 혹은 沙也加, 김충선) 역시 아름답고 인심 좋은 대구에 반해 이곳에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거두 한강 정구 선생을 비롯해 많은 선비들이 강학을 하고 충효를 다짐하고 동기 간 의리를 지키며 살아온 곳이 대구다.

1601년에는 경상도의 중심인 경상감영이 경주, 상주, 안동을 거쳐 대구로 옮겨와 대구는 명실상부 영남 최고의 도회(都會)로 자리 잡았다. 1907년 서상돈 등의 제안으로 일본에서 도입한 차관 1천300만원의 채무를 민족의 힘으로 갚아 주권을 회복하고자 결의했던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도 대구였다.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백척간두의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지켜낸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된 곳도 대구다. 4·19의거의 도화선이 된 2·28민주학생의거가 일어난 곳도 대구다.

인구 250만의 대도시 인근에 1,000m가 넘는 세계적 명산 팔공산과 비슬산이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볼 수 있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곳이 대구 말고는 세계 그 어디에도 없다. 인문과 자연이 조화로움을 이루고, 정의감과 의리가 넘치는 대구야말로 최고의 인문적·자연적 환경을 갖춘 삶의 터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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