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읽은 책]틀에 갇힌 관계로부터의 탈주

입력 2018-12-22 04:30:00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스미노 요루 저 /양윤옥 옮김/ 소미미디어 펴냄

기괴한 제목이 눈길을 끈다. '췌장'이 먹고 싶다니. 물론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이하 「너의 췌장」)는 식인과는 전혀 관련 없는 소설이다. 하지만 이 기괴한 제목은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적절한 변주다. 대체 뭐가 적절하다는 것인가. 제목이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평범한 남자 고등학생인 주인공은 맹장 수술을 받기 위해 앉아 있던 도중 별난 이름의 공책을 발견한다. 공책의 이름은 '공병문고', 병을 공유한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말로 굳이 풀이하자면 투병일기쯤 될 것 같다. 무심코 공책의 첫 장을 펼치자 놀라운 내용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이제 몇 년 뒤에 죽는다. 내가 앓는 췌장의 병은 대부분이 죽는 질병의 왕이다.'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저기요'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뒤에 서 있는 사람은 같은 반이지만 그다지 안면 없는 사쿠라. 평범한 청춘 연애 소설이라면 여기서 서로의 사연을 알게 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단계로 발전하겠지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아. 그래?"

사쿠라의 비참한 운명을 직접 들은 주인공의 반응 전부다. 그러나 자신 앞에서 의례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쩔쩔매는 사람들과는 다른 태도에 사쿠라는 오히려 기뻐한다.

"의사들은 내게 진실밖에 주지 않아. 가족은 내 말 한 마디에 과잉반응하면서 일상을 보상 하는데 필사적이지."
사쿠라는 진실과 일상을 함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이 무뚝뚝한 남자 동급생을 지목한다. 둘은 식사를 하고 장거리 여행을 함께 한다. 물론 독자들이 기대할 법한 사고는 터지지 않는다. 그들은 점점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지만, 일정한 선을 넘지 않는 기묘한 관계를 유지한다.

사회에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식, 문화라고 부르기도 하고 관습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 이 존재한다. 시대가 흐를수록 정교해지고 더 예의를 갖추지만 오히려 진심에서 멀어지는 역설이 발생한다. 즉, '너의 췌장'은 죽음을 앞둔 쾌활한 여학생과 무뚝뚝하면서 관찰력이 뛰어난 남학생의 이색적인 만남을 통해 '틀에 갇힌 관계에서 탈주'하며 서로의 진심에 다가가는 경험을 무겁지 않게 탐구한다.

소설 전반부는 주인공의 눈으로 이 기묘한 관계에 대해 기술한다. 사쿠라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한 의도적 장치인데, 사쿠라가 죽는 후반부에서 '공병문고'를 통해 이 관계가 사쿠라에게 얼마나 중요하고도 귀중했는지 드러난다.

'공병문고'에서 사쿠라는 '우리 관계를 흔해 빠진 이름으로 부르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둘의 관계는 친구 사이 우정이라기에는 깊고, 연인 사이 애정이라기에는 서로에 대한 애착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어떤 면에서 꽤 아슬아슬하다. 세상의 어떤 관계와도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의도치 않은 갈등 관계에 놓이기도 하고 미처 예상 못한 마음 씀씀이에 기뻐하기도 한다. 후반부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진심을 틀에서 벗어난 표현으로 담아낸다.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정종윤 학이사독서아카데미 회원

정종윤 작
정종윤 작 '벚꽃'. 벚꽃은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 '사쿠라(벚꽃)'를 연상시키는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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