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신춘문예] 희곡 당선작 소감 심사평

입력 2019-01-01 06:30:00 수정 2022-08-24 18:10:45

희곡 당선작= 제목: 밀항

◇ 등장인물

소녀 (10대 후반)

할아버지 (80대 후반)

남자 (40대 중반)

목소리1 (30대 초반) (화물칸 밀항자 남)

목소리2 (30대 초반) (화물칸 밀항자 여)

목소리3 (40대 초반) (미래항공 기장)

여승무원 1 (20대 후반)

여승무원 2 (20대 초반)

◇ 시간

방사능으로 오염된 미래

이른 겨울, 정오부터 밤까지.

◇ 공간

미래항공 비행기 밑바닥

바퀴집

◇ 무대

바퀴가 들어가 있는 바퀴 집의 내부

상수 중앙에는 비행기 바퀴가 올라가 있다. 바퀴는 거대한 지구본 모양을 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소녀는 바퀴 기둥에 밧줄을 연결해 나란히 그네를 타듯 매달려 있다. 상수 왼편에는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하수에는 여행용 가방들과 짐들이 수북하다. 바퀴 집 바닥은 창문으로 표현돼 있다. 소녀는 그 창문을 여닫으며 지상을 내려다본다. 소녀의 손엔 금색 망원경과 크레파스가 들려 있다. 지상을 내려다보고 올라올 때마다 지구본에 현재 위치를 표시해 나간다. 소녀와 할아버지의 몸은 스카프로 서로 묶여 있다.



1

할아버지 닫아.

소녀 조금만요.

할아버지 찬바람 들어.

소녀 바다예요.

할아버지 (붙잡으며) 떨어질라.

소녀 저길 봐요!

바누아투, 투발루, 사모아, 퉁가!

할아버지(소녀의 망원경을 빼앗아 들고) 어디.

소녀 방향을 바꿨어요!

할아버지 가만있어보자.

소녀 (지구본 모양의 바퀴를 굴리며) 보세요 똑같아요!

할아버지 죽은 고래 떼구나.

소녀 (망원경을 건네받으며) 그럴 리 없어.

할아버지 지난번에는 태평양에 표류하는 군함들을 가지고 섬이라더니

염병할, 이번에도 방향이 틀린 것 같구나.

소녀, 바퀴 집 밑으로 상체를 더욱 밀어 넣는다. 할아버지는 소녀의 발을 잡아당긴다. 소녀의 몸이 창문에 꼭 끼인 듯 움직이지 않자 할아버지는 바퀴 기둥에 자신의 발을 얹고 지렛대의 원리로 소녀의 몸을 뽑아 올린다.

할아버지(하품하며) 몇 번을 확인해도 마찬가지야.

소녀 다음 경유지에서, 바뀔 거예요.

할아버지 우린, 이번 웰링턴에서 내려야 한다.

소녀 거긴 이제, 아무것도 없잖아요.

할아버지 반대편으로 날아가고 있어.

소녀 (헛구역질을 하며) 지난번에도 막판에 기수를 돌렸어요.

할아버지 그 덕에, 우린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갔었지

그 악몽 같은 비행을, 다시 원하는 거니?

소녀 도착할 수만 있다면 몇 번이라도요!

할아버지, 소녀와 매달려 있는 밧줄을 기둥과 단단하게 다시 묶는다. 소녀, 바퀴 집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바람 소리, 엔진 소음에 둘은 서로의 말을 듣기 위해 외치듯 대화한다. 사이 소녀 몸을 돌려 구토를 한다.

할아버지 착륙하기 전까진, 의식을 잃어선 안 돼.

소녀 (몸을 웅크리며) 그렇지만 여긴, 고도가 너무 높아 어지러워요.

정신을 잃기 전에 (기둥에 기댄다) 교대로 쉬는 게 좋겠어요.

할아버지 이스탄불행 비행기에서 떨어진 밀항자 기억하지?

소녀 할아버지한테 십오 불을 꿔가고 갚지 않았잖아요.

할아버지 비행기가 착륙하려, 바퀴를 빼는 순간.

그 녀석이 그만, 정신 줄을 놓고 있다가

바퀴 집 바깥으로 튕겨 나가버린 게야.

소녀 (바퀴를 꼭 붙들며) 저는 절대 떨어지지 않아요.

할아버지 때를 놓친 밀항자에겐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단다.

소녀 이렇게 매달려선 사람이 살 수 없어요.

할아버지 안전할 거란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어.

소녀 미얀마에만 도착하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거예요.

할아버지, 소녀가 끌어안고 있는 바퀴를 만진다. 엔진 소음 잦아든다.



할아버지 꼭, 까맣게 그을린 벌집 같구나.

이 밑바닥에서 제일 질긴 게 있다면 이놈일 게다.

소녀 할아버지처럼요?

할아버지 (혼잣말로) 너무 오래 붙어있게 하진 않으마.

소녀 아빠는 모든 밀항자들이 이 알에서 태어난다고 믿었어요.

할아버지 여기에선 늘 기분 나쁜 냄새가 나.

소녀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아빠 얼굴은 생각이 나질 않는걸요.

할아버지 괜찮다, 여기서 벗어나면 모든 게 다 분명해질 테니까.

소녀 (끌어안으며) 이렇게 품고 있으면 금세 몸이 따뜻해져요, 할아버지도 해 봐요.

할아버지 너무 가까이하진 말거라,

이 바퀴 때문에 많은 밀항자가 죽었어.

소녀 밀항자들이 서로 이 바퀴에 지도를 그려 둔 덕분에

우리가 길을 잃지 않게 된 거라고요.

할아버지 이 놈이 니 아비를 삼킨 게다.

소녀 할아버지, 우린 아틀라스가 아니에요, (바퀴를 굴리며) 이건 징벌이 아니라 지도일 뿐이라고요. 그것도, 행운의 지도!

소녀, 밑바닥을 열어 고개를 뺀다.

바람 소리, 할아버지와 소녀의 몸이 흔들린다.

소녀 (명랑하게) 갈 거예요. 우리, 미얀마에서 만나기로 했잖아요.

할아버지 (하품하며) 바람난 니 엄마를 찾아가겠다는 걸 붙잡았어야 했는데, 염병할, 다 내 잘못이다.

바퀴 집 밖으로 몸을 빼느라 밑바닥 위엔 소녀의 하반신만 걸쳐져 있다. 할아버지, 소녀의 몸과 스카프를 기둥과 꽉 묶어주면 소녀 올라와 바퀴에 지도를 그린다. 바람 소리에 두 사람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둘은 얼굴을 바싹 기대어 말을 주고받는다.

할아버지(소리친다) 이번, 타이밍을 놓쳤다간 우리도 끝장이야.

소녀 할아버지 말처럼, 추락한다면

그곳에서 아빠를 만날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계단을 바라보며) 이틀간 물 한 모금 먹지 못했더니

굶어 죽게 생겼어.

소녀 들키면, 추방당할 거예요.

할아버지(자신의 여섯 개의 귀를 쓰다듬으며) 버틸 힘이 부족해 추락하는 것보다야 추방이 장수엔 좋지 않겠니? 이 할아비의 귀는

조종 칸에 파일럿들 하품 소리도 엿들을 수 있단다.

소녀, 밑바닥을 기어 내려갔다 올라와 바퀴살에 동선을 끼적이기를 반복한다. 기체 흔들리며 바람 소리 거칠어진다.

상수 왼편 객실을 통해, 안내 음성 먹먹하게 들린다.

목소리3 <아, 아, 잠시 후 저희 미래항공 경유지인 웰링턴에 정차하였다가 태즈먼해를 지나 산호해를 향해 나아갈 예정입니다. 난기류가 예상되오니 안전벨트 확인해 주십시오.>

소녀 (들떠서) 바꿨어요! 산호로 가요!

할아버지 난기류야, 기회는 지금뿐이다.

소녀 (단호하고 날카롭게) 여기서 그만둘 수 없어요.



할아버지, 몸에 묶인 밧줄을 푼다, 소녀, 바퀴 집 문을 열고 올라오다 할아버지와 눈 마주친다. (긴장감이 감돈다.) 소녀, 할아버지의 손을 붙잡고 밧줄을 못 풀게 하면, 할아버지 신경질적으로 밧줄을 풀기 위해 몸부림친다. 둘의 몸이 밧줄에 뒤엉킨다.

빙글빙글 지구본(바퀴) 주위를 돈다. 바퀴가 느리게 회전한다.

소녀 (하품하며) 제발 이제, 그만 좀 하세요!

소녀와 할아버지 몸이 뒤엉켜 주저앉는다.

목소리 등장

목소리2 저기, 사람이 있나요.

할아버지쉿!

목소리1 거기 누구 계십니까? 분명 소리가 들렸어 그치?

소녀 (명랑하게) 여기 둘 있어요!

할아버지(속삭이며) 조용히 해라! 비행기 안에선 누구도 믿어선 안 돼.

목소리1 (웃으며) 저희 둘뿐인 줄 알았는데 다행입니다.

소녀 우리도 바퀴 집에 꼼짝없이 달라붙어 있어요.

할아버지(입을 막으며) 얘야!

목소리2저희는 짐칸에 있습니다. 통돌이 세탁기 안이죠.

목소리1 처음 사과박스에 숨었다가.

한 시간 만에 질식해 죽을 뻔했지 뭐예요.

이제 견딜 만해요 아무것도 안 보여서 그렇지.

이 사람이 아이를 가져서 안전한 곳으로 떠나는 중이에요.

혹시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 수 있을까요?

미얀마를 지나친 것 같아서요.

소녀, 바닥에 납죽 엎드려 바퀴 집 뚜껑을 살짝 연다. 지상을 내려다본다. 바람 소리.

소녀 이제 웰링턴이예요, 미얀마까지는 아직 남았어요.

목소리1 혹시 도착하면 알려 줄 수 있니?

소녀 우리도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목소리2 꼭 좀 부탁합니다!

목소리 퇴장

소녀, 흥얼거리며 바퀴 집 틈으로 보이는 지상을 타이어에 그리고 있다. 기체 다시 심하게 흔들린다. 소녀, 바퀴에 바싹 달라붙어 몸을 떨며 헛구역질을 한다. 할아버지, 소녀의 몸을 바퀴에서 떼어내려 하면 소녀 바퀴를 더욱 바싹 끌어안는다. 둘의 실랑이는 할아버지의 긴 하품과 동시에 끝이 난다. 바퀴 집이 열리고 바퀴가 지면을 향해 미끄러지듯 빠져나간다.

비행기 착륙한다. 할아버지, 밧줄에 매달려 소녀의 몸을 꼭 끌어안는다.

자욱한 연기, (사이) 바닥에서 실내를 향해 빛이 반사돼 들어온다. 기체의 떨림 멈춘다.

할아버지 (밧줄을 손질하며) 만날 수 없을지도 몰라.

소녀 아직, 포기하긴 일러요.

할아버지 시신도 못 찾았지.

소녀 (지도를 표시하며) 아빠는, 엄마를 이 바퀴 집에서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누구라도, 여기서 얼어 죽지 않으려면

서로를 꼭 끌어안아야 했지.

소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가장 높은 밑바닥에서

제가 태어났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방사능이란 놈이 사람들 정신을 여기저기 헤집고 다닌 게야.

소녀 엄마를 찾아서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할아버지 염병할, 니 아비 성질에 그 연놈을 찾아가 죽이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지.

소녀 (헛구역질을 하며) 그럴 리 없어요.

할아버지 봐라, 여긴 언제 밑바닥이 열려 목숨 줄이 끊어질지 모를

형장이야.

저 바퀴, 꼭 새까맣게 타버린 네 아빠의 얼굴을 닮았잖아.

비행기가 날아오를 때마다 댕강댕강 네 아비의 목이 공중에서

흔들리는 것 같아, 이제 숨쉬기도 힘들다. (사이)

(소녀의 손을 잡으며) 너를 지켜 주기로, 약속했단다.

소녀 (울먹이며) 우릴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 네 아버지가 타고 떠난 바퀴 집이 돌아왔을 땐

끊어진 밧줄 몇 가닥이 전부였어.

소녀, 할아버지에게 안겨 두 발을 움켜쥔다. 할아버지 제 양말을 벗어 소녀가 신은 양말 위에 덧씌운다. 소녀, 발을 움켜쥐며 답답한지 몸을 굽힌다. 할아버지, 소녀의 몸에 밧줄을 조금 풀어준다.

소녀 비행기가 바닥으로 내려앉을 때마다 발가락이 아파요.

할아버지 환상통이야, 그때 내가 조금만 빨리 끌어당겼더라면.

소녀 (약간 냉정하게) 발가락이 열두 개였을 때나, 바퀴 집에 잘려

하나도 남지 않은 지금이나 병신은 매한가지죠.

할아버지 네 아버지도 니 발가락들을 참 예뻐했단다.

소녀 (발을 움켜쥐며) 곧 날아오를 거예요. 그러면 다시 괜찮아져요.

소녀, 비틀거리며 일어선다. 할아버지와 마주 보며 웃는다. 그러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주저앉는 소녀. 몸을 떨기 시작한다.

소녀 (헛구역질을 하며) 추워.

할아버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소녀에게 입혀준다. 바람 소리, 바퀴 집이 심하게 흔들린다. 기이한 소리를 내며 바퀴가 헛돈다. 소녀, 숨을 가쁘게 들이쉬고 내쉰다.

소녀 얼어 죽을 것 같아요

(할아버지 품을 움켜쥐며) 바다에 빠진 것처럼.

할아버지(소녀의 몸을 문지른다.) 여기서 내려야 해.

소녀 (붙잡으며) 여기에서 포기할 수 없어.

저 밑바닥 어디선가, 제 발가락들은 불타고 있을 거예요.

할아버지(자신의 손가락을 깨물며) 이걸 물고, 피를, 삼켜 보거라.

소녀 (뱉으며) 자꾸, 졸음이 쏟아져요.

할아버지(몸에 밧줄을 풀며) 아무래도, 다녀와야겠구나.

소녀 할아버지, 나 혼자 두고 가지 마요!

할아버지(미소 지으며) 금방, 돌아오마.



할아버지, 계단을 향해 일어선다. 소녀 엎어져, 멀어지는 할아버지를 바라본다. 할아버지 상수를 따라 한 걸음씩 나아가면, 소녀 오들오들 떨면서 바퀴를 끌어안는다.

할아버지 계단을 타고 사각의 빛을 향해 올라간다. 교차 되며 불빛 하나가 계단을 따라 내려온다. 소녀 몸을 떨며 할아버지가 입혀준 외투를 바싹 끌어당긴다. 계단을 따라 내려오던 불빛이 소녀를 향해 다가온다. 소녀 바퀴 뒤쪽으로 몸을 숨기면 불빛이 소녀를 따라와 비춘다. 소녀, 다가오는 불빛을 피해 몸을 기울인다. (사이) 눈앞에 다가와 머뭇거리는 불빛과 대치하는 소녀.

소녀 (웅크리며) 누구세요?

소녀, 남자의 불빛에 몸이 더욱 움츠러든다. 남자, 품에 맞지 않는 찢기고 피범벅이 된 승무원복을 입고 있다. 다가와 소녀 앞에 앉는다. 이마에 눈이 두 개 더 달려 있다. 품속에서 모자를 꺼내 얼굴이 보이지 않게 깊이 눌러쓴다.

남자 (다정하게) 데리러 왔다,

소녀 승무원? (놀라서 몸을 떨며) 한 번만, 눈감아 주면 안 될까요?

미얀마까지라도.

남자 올라가자, 이제 괜찮아.

소녀 나, 걸을 수도 없어요.

남자, 소녀의 발을 내려다본다. 소녀의 주변을 랜턴 불빛으로 살핀다.



소녀 (히스테릭하게) 아무것도 없어!

남자, 다가가 소녀를 끌어안듯, 몸에 스카프를 푼다. 소녀 불안스레 떨며 소리 지른다. 손에 쥔 망원경을 남자에게 휘두른다. 남자 얼굴을 맞고 바닥으로 쓰러진다. 소녀, 남자의 팔을 깨물고 놔 주지 않는다.

남자 (비명과 함께 몸을 구른다.) 여기 있으면 안 돼!

객실로 올라가자.

소녀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고요! 우릴 그냥 내버려 둬요!

남자, 바퀴에 몸을 기댄다, 지구본(바퀴)이 굴러간다. 이가 딱 맞는 나머지 반대편의 지도가 드러난다. 밀항자들이 그려 놓은 지도와 소녀의 지도가 맞물려 굴러간다. 남자, 바퀴를 천천히 굴리며 바라본다. 품속에서 담배를 꺼내 한 대 태운다.

소녀 얼마 안 남았어요.

남자 (굴러가는 지구본을 보며 지친 듯) 그들이 올 거다.

너 하나라면 아직 기회가 있어.

소녀 그냥 여기 있게 해주세요! (사이)

남자, 지구본에 담배를 비벼 끄면. 소녀, 지구본을 스카프로 문지른다.

소녀 아덴만, 아라비아, 래카다이브, 벵골만, 타이만

남자 너를 찾는 데만 십 년이 걸렸어!

소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저는 제 발가락들을

저 밑바닥에 잘라 두고 와야 했어요!

남자 이제 밑바닥을 헤매고 있는 밀항자들은

네가 뿌려 놓은 발가락을 따라 걷느라

더 이상 길을 잃지 않을 거란다. (손 내밀며) 올라가자.

떨어지지 않으려는 소녀와 바퀴 기둥에서 소녀를 떼어 내려는 남자의 실랑이가 벌어진다.

기체가 흔들리며, 엔진 점화 소리가 들린다.

남자, 포기한 듯 소녀를 마지막으로 꼭 끌어안고, 밧줄에 앉힌다.

남자 (소녀의 손을 밧줄에 쥐여 주며) 이제 이륙할 거야, 대부분의 밀항자가 이곳에서 의식을 잃거나 동사한 제 몸을 비행기 밖으로 놓쳐 죽게 되지.

소녀 (몸을 떨며) 멈추지 않을 거예요.

남자 (소녀의 몸을 흔들며) 이 구간을 견뎌서, 미얀마에 도착한 밀항자는 아직까지, 단 한 사람도 없었어!

올라가면 모든 게 안전해질 거야.

소녀 이런 식으로, 저희 엄마도 데려갔나요? (사이)

사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낸다. 소녀에게 그것을 손에 쥐여준다.

남자 지니고 있거라.

소녀 (저항하며) 필요 없어요. 염병할 승무원들, 엄마도 모자라서 나까지 잡아먹으려는 거죠?

남자 오래 전에 줬어야 하는데. 이제 아무도 널 의심하지 않을 거야.

소녀, 남자가 건네준 티켓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고민에 잠긴 듯 고개를 숙인다.

소녀 (고개를 숙이며) 당신들한테 다시는 속지 않아!

비행기 흔들린다. 바람소리,

이륙을 하는 충격으로 소녀와 남자가 뒹군다.

목소리3 <우리 미래항공은 이륙 후 앞으로 세 시간 후 필리핀을 통과해 미얀마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손님 여러분들께선 가벼운 기내식이 제공될 예정이오니, 필요한 사항이… >

남자, 모자를 벗어 소녀에게 씌워준다. 두어 걸음 소녀 뒤로 물러선다. 소녀, 남자의 얼굴에 붙어 있는 네 개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올려다본다. 무언가 기억나려는 듯 움찔한다. 엔진 소음, 바람 소리, 이륙을 알리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남자 (혼잣말로) 언젠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소녀 (중얼거리며) 네 개의 눈동자. (남자를 붙잡는다) 잠깐만요.

우리 어디에서 만난 적 있죠.

남자, 미소 지으며 바퀴 집이 닫히기 직전 지상으로 뛰어내린다. (암전)

2.

기내 퍼스트 클래스.



할아버지 로열석에 앉아 레드 와인과 함께 영화 아비정전을 보고 있다.

기내는 밑바닥과 계급 차이가 노골적으로 느껴질 만큼 호화스럽다. (영화음악 흐르다 잦아든다.) 소녀 눈치를 보며 두리번거린다. 조금씩 바닥을 기어가 좌석 하나를 차지하고 앉는다. 비치된 음식물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한다.

소녀 처음 엄마 손을 놓쳤을 땐 아무렇지 않았지. (우물거리며) 그냥 놓친 거니까. 그런데 놓은 거였어. 10년 전, 비행기 승무원 남자랑, 엄마는, 우리가 잠든 사이에 (우물거리며) 유일하게 방사능이 도달하지 못한 곳, 미얀마행 비행기를 타고 떠나버렸어. 방사능은 어떤 상상력보다 빠르게 퍼져버렸고, 지하철도, 자동차도, 집도 그 오염된 물에 닿는 건 녹이 슬거나 쓸모없어졌어. (우물거리며) 다이아몬드를 준다 해도 국경을 통과할 티켓을 구할 수가 없었어. (우물거리며) 그리고 나도, 할아버지도 그깟, 퍼스트 클래스 항공권 한 장 때문에, 이렇게, 버려졌지. (우물거리며) 매일 나는 울기만 했어, 그럴 때마다 내게 할아버지는, 엄마를 찾으러 떠난 아버지 이야기를 해줬어, 아버지는 죽은게 아니라고 지금도 어디선가, 바퀴 집을 타고 미얀마를 향해 날아가고 있을 거라고. 누구도 아버지의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게 우리 밀항의 시작이 됐어.

(먹고 있던 음식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통로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승무원1, 2 등장. 소녀 도망치기 위해 비틀거리며 걷다 주저앉아 바닥을 기어간다. 계단을 타고 내려간다. 할아버지 승무원1에게 붙잡혀 몸부림을 치다 바닥에 미끄러져 넘어진다. 할아버지, 승무원1과 몸싸움을 벌이다 간신히 뿌리치고 계단을 향해 도망친다. (암전)



3.

심야의 비행,

바퀴 집 안

계단을 따라 느리게 기어 내려오는 소녀. 할아버지 이마에 피 흘리며, 바퀴 집 기둥에 쓰러져 있다. 할아버지의 손에서 떨어진 와인 병 하나가 바닥을 뒹군다

소녀 (흔들며) 할아버지 정신 차려요 잠들면 안 돼.

할아버지(하품하며) 염병할, 너무 졸립구나, 난 이제 너무 지쳤다.

할아버지의 몸이 기울어지며 바퀴 집 바닥을 누른다. 바퀴 집이 벌어지면서 거친 바람이 밀려들어 온다. 바람 소리, 바퀴 집 문이 열리다 닫히는 사이, 금속음이 울린다. 할아버지 천천히 그 사이로 미끄러진다. 소녀, 할아버지를 양 손으로 꼭 붙들고 있다.

소녀 스카프가 풀렸어요, 어서 이걸 잡아요.

할아버지이제 너는 안전하다.

소녀 (할아버지를 붙잡으며)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같이 가요!

할아버지네 아비와의 약속,

너를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어서, 이러다 같이 가겠구나.

소녀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할아버지.

덜컹,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의 하체가 비행기 밑바닥으로 빠져나간다. 바퀴 집에서 끼긱 소리가 난다. 바퀴가 헛돌고 엔진과 기계음이 울린다. 연기가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이대로는 바퀴 집이 고장 나겠구나,

그럼 여기 모든 사람이 죽는단다.

소녀 우린 함께 무사히 도착할 거예요. 이제 금방이에요.

할아버지 (소녀의 뒤편을 바라보며) 니 아버지가 왔구나.

역시, 여기에 있었어.

소녀 (힘이 다한 듯) 너무 취했어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네 개의 눈동자가 여전히 예쁘구나! 저 이마를 한 번 더 만져보고 싶은데.

소녀 (두리번거리며) 여긴, 우리 둘뿐이에요.

소녀, 무언가 생각난 듯 오른손으로 품속에서 티켓을 꺼낸다.

소녀 저에게 티켓이 한 장 있어요 할아버지,

이곳으로 함께 올라가요.

할아버지(혼잣말로) 결국, 일을 치르고야 말았군.

(건네며) 이건, 니 자리다.

할아버지, 소녀가 건넨 항공권을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뜨린다. 소녀의 왼손에서 할아버지가 조금씩 미끄러진다. 재빨리 양손으로 할아버지를 끌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는 소녀. 기계음 소리, 바람 소리 때문에 서로의 말이 잘 들리지 않는다. 소녀, 할아버지와 함께 바퀴 집 사이로 밀려들어간다.



할아버지니 염병할 발가락들, 이 할아비가 꼭, 되찾아 놓으마.

소녀 (울먹이며) 이 손 놓지 말아요!

할아버지, 소녀의 손을 놓으며 밑바닥으로 미끄러진다. 덜컹,

바퀴 집의 문이 열렸다 닫히면서 헛돌던 바퀴가 멈추고

할아버지, 보이지 않는다.

연기, 잦아든다. 소녀, 할아버지를 놓치며 고꾸라진다.

소녀 (절망적으로) 할아버지! 할아버지! (사이)

목소리3(잡음과 함께) 우리 비행기는 앞으로 10분 후 미얀마공항에 도착합니다. (암전)

에필로그

여승무원1, 2 등장 계단을 따라 조심스럽게 내려온다. 기체 흔들린다. 엔진 소리, 바람 소리. 여승무원1, 2 위태롭게 서로를 의지하고 있다. 랜턴으로 바닥을 비추자. 상수 하수에서 유령들이 출몰하듯 하품 소리와 헛구역질 소리들이 들려온다.

여승무원1 무슨 일이래?

여승무원2 이상하지.

여승무원1 (손수건으로 입을 막으며) 연기야 고개를 숙여.

여승무원2 항상 착륙할 때가 되면 들려와.

여승무원1 잘 비춰 봐 이번엔 놓쳐선 안 돼.

여승무원2 분명 아무도 없어, 봐봐.

여승무원1, 여승무원2 뒤에 바싹 붙어 있다.

둘은 천천히 바퀴 집까지 다가온다. 자욱한 연기, 아무도 없다.

여승무원1 저게, 뭐지?

여승무원1이 가리키는 곳에 여승무원2가 랜턴을 비춘다.

바닥에 소녀가 쓰러져 있다.

여승무원2 (흔들며) 꼬마야, 밀항자인가?

여승무원1 아니야 손에(읽으며) 퍼스트클래스 항공권이 있어.

그런데 이건, (망설이며) 십 년 전 티켓이잖아.

여승무원2 데려가자. 그냥 두면 죽을 거야.

여승무원1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인다.

비행기 안내음이 울린다.

목소리3<우리 비행기 곧 착륙합니다. 안전벨트를 매주십시오.>

여승무원1 소녀를 끌어안고 서둘러 계단을 올라간다. 화물칸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 여승무원2 수상한 듯 주위를 둘러보다 뒤따라 올라간다.

여승무원1, 2 퇴장

바퀴 집이 완전히 벌어지면 바퀴(지구본)가 회전하며

기체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기둥에 걸려 있던 스카프가 공중으로 한 무리 벌떼처럼 날아간다

비행기, 흔들리며 착륙한다. 엔진음, 바람 소리 멎어간다.

목소리3 <아, 아, 지금 우리 미래항공은 최종 목적지인 미얀마, 미얀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도록 자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사이)

목소리1 (속삭이듯) 저기요,

목소리2 사람 있나요?

바닥에서 머리가 둘 달린 거대한 샴쌍둥이(목소리1, 2)의 그림자가

일어선다.

조명 어두워진다.

불빛 하나가 소녀와 할아버지가 있던 자리를 향해 툭, 떨어지면

끊어진 밧줄 조각들이 바람에 날린다. (암전.)

◇ 당선 소감/ 이주호

이주호 희곡 부문 당선인
이주호 희곡 부문 당선인

코트를 한 벌 선물 받았습니다. 이 옷을 걸친다 해서 제가 다른 누군가로 변하는 마법이 일어나진 않겠지요. 긴 겨울, 바퀴 집 안에 웅크려 있던 저의 이야기를 바깥으로 끄집어내 주신 매일신문사와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당선 소식을 전해주신 매일신문 조두진 기자님 감사합니다. 글쓰기를 가르쳐주신 김경주 시인, 극작가님과 안웅선 시인님, 이강백 극작가님, 장성희 극작가님, 故윤조병 극작가님, 김창래 감독님, 황선미 작가님 고맙습니다.

사랑하는 나의 아버지 고맙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 등에 업혀 창신동 골목길을 오르던 날들이, 힘들 때마다 저를 견디게 합니다. 아버지의 넓고 따뜻한 등이 있어서 저는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습니다. 사랑으로 저를 길러주신 어머니 고맙습니다. 어머니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병중에 계신 나의 할머니, 지금은 말을 나눌 수 없지만 의식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불러준 제 이름과 귀한 마음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이 순간에도 할머니 곁을 지키고 있는 삼촌, 고맙고 사랑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모두 고맙습니다.

함께 시를 쓰는 나의 가장 소중한 지우들, 교오, 사이, 윤효정, 전수오, 김신혜, 강소연, 채두리, 에게 감사드립니다. 부족함을 아는 미덕으로 끝까지 배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저를 가르치고 일깨워주려는 선의들을 따라 끝까지 갈등하며 걷겠습니다.

한결같이 나의 곁을 지켜주는 경세형, 제가 무엇을 하든 따뜻하게 대꾸해주는 오지의 마법사 한규 형과 경희 누나, 맛있는 거 먹자며 불쑥 안부 물어주는 리안 형님, 나보다 망원동을 더 잘 아는 속 깊은 친구 선덕, 이제야 1호점 미선씨, 늘 좋은 극으로 저를 초대해주는 배우 이훈희 (누나), 스무 살에 방 하나를 빌려 함께 시를 썼던 인연들 민국, 용각, 연휘형님, 가슴 답답할 때마다 환기구가 되어주는 친구들 김명진, 안선욱, 이인엽, 이종민, 윤동규, 하승엽, 잘 지내냐며 먼저 안부 물어주는 탁이 형, 진철이 형. 먼 곳에서, 가장 가깝게 손 흔들어주는 친구 안서연 모두 고맙습니다.

▶ 약력/ 이주호

1987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 희곡 심사평

최현묵 극작가
최현묵 극작가

매일신춘문예에 신설된 '희곡, 시나리오 부문'에 응모된 작품은 첫 공모임에도 128편이나 됐다. 다문화, 청년실업, 코피노, 난민, 재건축과 빈부격차 등 오늘날 우리 현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현실에 대한 응모자들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극적 감각과 글쓰기 훈련이 보이는 작품과 자기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해석한 작품을 중심으로 선별하여 심사를 진행했다.

김윤미 극작가
김윤미 극작가

'밀항'은 하늘을 나는 비행기 바퀴 집 내부를 무대로 삼은 독특한 작품이다. 시적인 대사와 몽롱한 사건 처리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와 무대 위 거대한 바퀴살 내부의 어둠과 대비를 이루며 방사능으로 오염된 미래 밀항자들을 보여준다. 기형이 된 사람들과 아버지를 찾아가는 등장인물들의 여정 등 애매모호한 상징은 혼돈을 줄 수 있으나 마지막 장면의 반전은 신선한 무대를 관객에게 경험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 심사의 의견이 일치했다. '매미허물'은 임대아파트 앞 편의점에서 유통기한 지난 음식으로 가난을 견디는 가정을 보여준다. 매미울음이 가득한 여름날 직장을 잃은 가장, 이중알바로 생활비를 벌며 묵묵히 가난을 견디는 아내, 과거와 현재의 장면이 별다른 계기 없이 구성된 작품으로 매미울음에 대한 남편과 아내의 상반된 해석이 묘한 여운을 준다. '가족입니까?'는 남자 상사의 성희롱에 다르게 대응하는 여직원의 세대 차이와 연대를 그린 작품이다. 인물의 전형성으로 인한 남자상사와 여직원의 단순한 대결구도는 아쉬움을 주지만 자연스러운 경상도 사투리와 긴장된 극적 상황을 끌고 가는 힘은 장점이다. '고물성'은 아버지가 주워온 고물로 발 디딜 틈 없는 단칸방에 고립된 딸을 보여준다. 간결한 대사와 단순한 살인, 인물의 변화 없이 극이 끝나는 아쉬움이 있다. 실제 인물을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눈에 띄게 많았는데, 대상과의 거리두기가 필요해 보인다. 다큐멘터리적 소재와 익숙한 상업영화를 연상시키는 작품이 많은 점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심사위원=최현묵(극작가), 김윤미(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