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숲, 도서관 그리고 당신

입력 2018-11-13 11:55:53

김정희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외래교수

김정희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외래교수
김정희 대구사이버대 상담심리학과 외래교수

나는 도서관을 좋아한다. 이 말은 책을 좋아한다는 말과 비슷하지만 분명 다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숲속을 거닐 듯 책장들 사이로 걸어 다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책이 가득 꽂힌 책장들이 마치 숲속의 줄지어 선 나무들처럼 보이는 큰 도서관을 좋아한다. 숲속을 거닐 듯 그렇게 말이다.

이런 선호를 갖게 된 것은 몇해 전 제주도의 비자림 숲을 방문한 뒤 부터이다. 추운 겨울에 찾아간 숲은 제주도의 거센 바람이 불지 않는 요새 같았다. 비자나무로 우거진 숲속으로 들어가니 내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듯한 신비함마저 들었다. 하늘로 열린 듯한 숲의 지붕으로 햇살이 내리쬐는 고요한 전경은 다른 차원의 공간처럼 보였다. 그리고 나무사이로 슬며시 불어온 바람과 햇살이 만들어내는 조명은 숲속의 여기저기로 나를 이끌며 안내하는 듯했다.

이렇게 숲은 나에게 낯설지만, 매력적인 하나의 생명체 같이 느껴지고, 숲속의 나무들은 숲의 역사를 품고 있는 것 같다. 이는 도서관의 책들도 마찬가지이다. 책은 저자가 불어넣은 생기를 품고 있으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숲속을 거닐 듯 도서관의 책장 사이를 거니는 것을 좋아한다.

상담실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숲속의 나무들이 들려주는 역사처럼, 도서관에 꽂힌 많은 책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나를 찾아온 이들도 삶의 사연을 갖고 있다. 그 사연들은 숲속 나무의 나이테처럼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의 어떤 유명한 문학 작품만큼 가치있다. '한 사람의 생명이 다한 것은 하나의 작은 도서관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라는 말을 한 어떤 이는 아마도 오랜 역사가 만들어 낸 개인의 사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느껴본 사람일 것이다.

그들의 소중함은 몇년 전 흥행한 '아바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속 주인공은 어느 날 나비족들이 사는 숲의 신비한 소리나무를 만난다. 자신과 나무가 닿는 순간 나무의 기억들을 수 있는 신기한 경험을 한다. 나무와 교감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유독 인상적인 것은 영화의 영상미가 탁월한 탓도 있지만, 아마 내가 심리상담사라는 이유일 지도 모른다. 말 못하는 나무일지라도 그들만의 이야기가 존재하고, 그 이야기를 타인이 들어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단 한 명만 있어도 살 수 있다'는 생명존중 강의의 문구처럼, 우리는 반드시 단 1명의 누군가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아무리 개인주의가 심화되어 갈지라도, 서로가 진심으로 이야기를 들어준다면 그 누군가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하나의 생명이 작은 도서관이라면, 좁디 좁은 작은 도서관일지라도 숲속을 거닐 듯 천천히 걷고 싶다. 그들이 들려주는 기억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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