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은행나무

입력 2018-10-09 05:00:00

조향래 논설위원
조향래 논설위원

20여 년 전 영화 '은행나무 침대'는 한국적인 정서로 풀어낸 환생과 윤회의 가설에 현대적인 감각을 보탠 비극적인 멜로 서사였다. 출연 배우들의 열연과 미려한 음악 그리고 당시 처음으로 도입한 컴퓨터 그래픽으로 시공간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영상을 구성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은행나무의 오랜 역사성을 원용한 것이었다.

강화 볼음도에 가면 이별의 서러움을 안고 사는 은행나무가 있다. 이 노거수(老巨樹)는 원래 황해도 어느 마을에서 암수 짝을 이뤄 살던 수나무였는데, 800여 년 전 홍수로 뿌리째 뽑혀 홀로 떠내려온 것을 어민들이 건져서 심었다는 것이다. 그 후 두 지역에선 음력 정월에 각각 제사를 지내왔는데, 남북 분단으로 명맥이 끊겨 버렸다. 그런데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를 타고 '부부 은행나무' 제례 방안을 다시 모색하고 있다고 한다. 은행나무도 남남북녀이던가.

전등사에 있는 수령 600년의 은행나무 두 그루는 꽃은 피어도 열매는 맺지 않는다. 여기도 그만한 사연이 전한다. 조선 후기, 무리한 은행 공출을 요구하는 관아의 압력을 견디다 못해 '더 이상 열매를 열지 않게 해달라'는 제사를 올린 후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래된 은행나무는 저마다 이렇게 역사의 향기를 간직한 채 사람들의 이목과 발길을 이끈다.

가을에 마주하는 은행나무는 낭만의 대명사이다. 노란 캔버스로 변하는 숲이며, 노란 카펫을 펼쳐놓은 듯한 길이며, 속절없이 흩날리는 노랑 잎새는 조락의 계절인 가을 정취의 압권이다. 이 같은 심미적 기능에다 공기 정화 능력이 탁월한 은행나무는 가로수로도 제격이다. 단 하나 흠이 있다면, 암나무에서 떨어진 열매에서 풍기는 고약한 냄새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지 않는 수나무로 차츰 교체해나가면 머잖아 악취도 해결이 가능할 것이다. 예전과는 달리 조기에 암수를 구별하는 기술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대구시는 지난달 중순부터 열매가 떨어져 냄새를 풍기기 전에 미리 채취하는 '은행나무 기동반'을 운영한다고 했다. 그것도 한 방법이다. 가을 한철 냄새 때문에 은행나무를 박대하기에는 얽힌 역사와 정서가 너무도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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