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대 교수
그대, 삶을 사랑하세요? 그게 무슨 질문이냐고, 자기 삶을 사랑하는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고 싶으세요? 톨스토이가 '전쟁과 평화'를 통해 말했습니다. 삶을 사랑하는 것은 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세상의 고통 속에서, 죄 없이 받는 고통 속에서 삶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어렵지만 또한 가장 큰 기쁨이라고.
삶에 대한 사랑의 고백은 혹독한 삶의 바람을 어쩌지 못해본 경험이 있는 자의 고백일 때 힘이 있습니다. 삶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경멸해본 적이 있는 자가 어느 날 그 바람이야말로 삶이 자기에게 낸 미묘한 수수께끼였음을 고백하게 될 때 니체가 사랑한 여인 살로메의, "생에 바치는 찬가"가 그의 노래가 될 것입니다. 신비에 가득 찬 생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벗이 그의 친구를 사랑하듯이, 몇 천 년을 사색하고 생을 누리기 위해 그 두 팔로 힘껏 안아주십시오. 이제 더 주실 행복이 없다면 당신의 고뇌를 주십시오.
'전쟁과 평화'의 배경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략입니다. 작품에서 전쟁이 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고통스러운 삶이 '나'에게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는 전쟁이 배경인 것이 의미 있습니다. 삶이 전쟁이니까요. 그런데 아십니까? 우리를 전장에 끼어들게 만드는 것은 역사적 사명감을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명분도, 교과서에 기록된 대단한 가치도 아닙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몸에 밴 안드레이가 폭력을 싫어하고 전쟁을 싫어하는 친구 피에르에게 전쟁터로 가는 이유를 설명하는 대목이 눈에 뜁니다. "내가 왜 전쟁터로 나가는지 아나? 나폴레옹이 괴물이라서? 아니면, 러시아가 강대국이 될 거라 믿어서? 아니네. 내가 떠나는 건 모스크바 최고의 미녀와 사는 게 참을 수 없어서야."
안드레이의 말이 힘이 있지요? 정략결혼에, 파티가 일상인 귀족 청년이 자기 삶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 그림자를 만지려 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는 함부로 살아도 되는 것이 마치 특권인 양 술과 여자와 노름과 파티 속에서 젊음을 낭비하며 오로지 그런 삶을 누릴 힘을 가지기 위해서만 애를 쓰는 그런 귀족이 아닙니다. 그에겐 가치를 아는 든든한 아버지가 있고, 사랑스런 누이가 있고, 믿음을 나눌 친구가 있습니다. 그래도 그림자는 어쩔 수 없지요?
도피하듯 그렇게 전쟁터로 떠나지만 전장에서 안드레이는 누구보다도 괜찮은 리더입니다. 그는 그가 전쟁터로 떠난다고 하자 이렇게 조언하는 아버지의 아들이니까요. "자, 이제 작별이구나, 한 가지를 기억해라. 안드레이 공작, 네가 죽는다면 나는, 이 늙은이는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네가 니콜라이 볼콘스키의 아들로서 제대로 처신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면 나는 수치스러울 것이다."
수 백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대작이지만 '전쟁과 평화'를 이끄는 인물은 세 사람입니다. 서자 출신으로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기까지 어두운 시절을 보냈던 피에르,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정의와 선까지 겸비한 귀족 안드레이, 그리고 이들이 사랑하는 밝고 순수한 여인 나타샤입니다.
순수한 사람은 뜨거운 열정에 사로잡히지 않는 사람도, 어리석은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도 아니지요? 순수한 사람은 물불 가리지 않는 열정에 상처입고 실수를 했더라도 그 경험을 소화하며 되새김질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약혼자 안들에가 전쟁터에 나가있는 1년, 아름다운 나타샤에게 예상치 못했던 강렬한 유혹자가 생깁니다. 그 황홀하고 달콤한 유혹에 빠진 나타샤는 평판을 잃고 안드레이를 잃습니다. 그녀의 배신에 마음이 타고 증오의 잿더미만 남은, 다 닺춘 선한 남자가 어찌 그녀에게로 돌아오겠습니까? 안드레이의 선은 배신한 나타샤를 악으로 규정하며 그 무엇으로도 녹아내리지 않는 성벽이 되어 그를 고립시키고 있다는 것을 그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삶이 전쟁이라고 할 때 그 전쟁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내전이기도 한 거지요? 삶은 전쟁이고 혹 우리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어렵고 위험한 전쟁을 수행하는 전장의 리더인 것은 아닐까요? 톨스토이가 쓰고 있습니다.
"모든 전투는 지휘관의 예상대로 수행되지 않는다. 이것이 본질적인 조건이다."라고. 삶은 마음대로, 예측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언제나 생각하지 못하는 곳에서 매듭이 생기고, 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매듭이 풀립니다. 그렇게 맺혔던 안드레이의 매듭이 언제 풀리는 아십니까?

언제나 구원은 엉뚱한 곳,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찾아오는 법입니다. 안드레이가 부상자가 되어 의식불명으로 돌아왔을 때 나타샤가 그를 극진히 간호합니다. 안드레이의 구원은 그의 부상에서, 죽음으로 인도하는 길목에서 찾아왔습니다. 병이 찾아드니 의식의 끈이 약해지고 의식의 파수꾼이 힘이 빠진 사이 진실이 드러나는 거지요? 겨우 의식이 돌아온 안드레이가 나타샤에게 하는 말은 진심입니다.
"이제 당신은 그날 밤새 춤추던 그 소녀가 아니야. 달님에게 속삭이던 소녀도 아니고. 당신은 뭔가 달라졌고 더 멋져졌어. 얼마나 평화롭고 고귀한지, 나는 당신을 아주 많이 사랑해. 이제야 터놓고 얘기할 수 있다니 슬픈 일이지. 나는 지금까지 사랑을 몰랐어. 그저 나는 증오심이 많은 사람이었어. 많은 것을 증오했고, 당신도 증오했었어. 이제는 정말 당신을 사랑해."
안드레이는 바른 생활의 남자입니다. 선이 지나치면 악이 되듯이 바른 생활의 사람이 지나치면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지치게 하기 때문이지요? 주변에 온통 맘에 들지 않아 비판받아야 할 사람뿐이니 어찌 증오를 담지 않을 수 있고 어찌 지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지쳐 진실에 가 닿지 못할 때 그를 사랑한 운명은 어떤 충격을 주며 바른 사람을 진실한 사람으로 인도하나 봅니다.
안드레이가 윤리와 관습이라는 잿더미 속에 묻혀있는 사랑의 불씨를 되살려 진실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를 찾아온 죽음 때문이었습니다. 죽음이, 병이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가 진실해질 수 있었을까요? 그를 찾아온 죽음이 진실을 밝히는 등불이었던 거지요. 보왕삼매론의 첫 구절이 생각나지요?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이르시기를 병고로서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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