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 시대가 평화로울 것을 믿어 마지않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은 1938년 9월 영국 총리 체임벌린이 런던 다우닝가 총리 관저 앞에 몰려든 지지자들에게 던진 말이다. 광기 어린 히틀러의 등장으로 영국민들이 전쟁의 공포에 떨던 때, 체임벌린은 적의 심장부인 독일 뮌헨을 찾았다. 그리고 히틀러와 담판했다. 그는 히틀러에게 체코 땅 주데텐란드를 넘겨주는 대신 '평화'를 약속한 선언서를 받아 들고 왔다. 돌아와 환호하는 군중을 향해 이를 흔들며 '이것이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의기양양해했다. 히틀러는 그에게 더 이상 독재자가 아닌 "한 번 약속을 하면 믿을 수 있는 사나이"였다.
영국 국민 또한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됐다며 열광했다. 하지만 '믿을 만한 사나이'에게서 약속받은 '평화'는 1년을 가지 않았다. 이듬해 9월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이다. 히틀러는 '평화'를 적은 종이 한 장으로 유럽의 호랑이던 영국을 간단히 무장해제시킨 셈이다. 체임벌린은 속았다. '전쟁만은 피해야 한다는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히틀러의 가식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 지도자를 둔 죗값은 고스란히 국민 몫이었다. 영국은 군인만 26만4천 명이 목숨을 잃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잊을 만하면 역사는 되풀이된다.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와 월맹(북베트남)의 르 둑 토가 월남전 종전을 다룬 '파리평화회담'이 또 그랬다. 당시 월맹의 요구 조건은 '평화협정' 체결과 '미군 철수'였다. 1973년 1월 마침내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됐다. '베트남의 평화적 수단에 의한 단계적 통일'을 약속했고 미군은 철수했다. 이후 월맹은 표변했다. 1975년 3월 10일 월남(남베트남) 총공세를 감행했다. 협정 체결 2년도 안 되어서다. 월남은 남남 갈등으로 갈가리 찢겨 있었다. 전쟁이 나면 다시 오겠다던 미군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여 만에 월남이란 나라는 지도 상에서 사라졌다.
선언적 의미의 '평화협정'은 허무하다. 지도자의 믿음 속 '평화'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정은을 "젊지만 아주 솔직 담백한 인물"이라 평했다. 그가 "비핵화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하다. 김정은의 친서를 받아 든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역시 "그는 나를 좋아하고 나는 그를 좋아한다"고 했다. 반면 김정은은 연일 '초라하다'며 몸을 낮췄다. "우리가 속임수를 쓰면 미국이 강력하게 보복할 텐데 그 보복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너스레도 떨었다.
외교 관계에서, 특히 정상들이 이런 말의 성찬을 나누는 것은 나쁘지 않다. 트럼프의 협상 스타일 "상대방을 평가하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협상하는" 3단계 방식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행동이라면 달라야 한다. 트럼프의 태도는 시사적이다. 김정은을 좋아한다 말하면서도 '비핵화가 일어날 때까지' 대북 제재 고삐를 더 죄고 있다. 비행금지구역 확대, 중거리 지대공미사일 철매-2 사업 중단 등 무장해제가 속속 이뤄지는 우리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평화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군사력과 정신적 무장 상태를 유지할 때 가장 가까이 다가온다. 전쟁 자격이 없는 일본이 우리보다 훨씬 강한 군대를 유지하는 이유다. 체임벌린과 파리평화회담이 던진 교훈을 과거의 일로 치부해선 안 된다. 또 아픈 역사가 되풀이될까 저어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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