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가 낳은 항일 의병장 왕산 허위] <6>13도창의군 서울진공작전

입력 2018-06-21 11:01:58 수정 2018-06-21 17:42:59

"일제 몰아내고 서울 탈환" 전국서 모인 의병 1만명 총지휘

전국연합의병을 최초로 결성한 뒤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세워져 있는 13도창의군 기념탑.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전국연합의병을 최초로 결성한 뒤 서울진공작전을 펼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 중랑구 망우리공원에 세워져 있는 13도창의군 기념탑.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허위는 경상·충청·경기·강원·전라도 등지를 돌아다니며 곽종석, 이학균, 유인석 등 여러 지사와 만나 의거를 결의, 또다시 의병 운동을 일으켰다. 각지에서 일제 군경과 맞붙었고, 친일분자를 색출해 처단했다.

특히 전국 각지에서 활동 중이던 의병들을 모아 13도창의군을 창설했다. 전국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의병들이 한곳에 모여 제대로 된 군대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총대장이었던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 소식에 고향으로 발길을 돌리고, 13도창의군 총대장이 된 허위는 일본통감부 공격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렇지만 후발지원군의 늦은 도착과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면서 13도창의군은 서울진공작전에 실패하자 흩어지는 아픔을 겪었다. 13도창의군이 처음으로 전국 각지의 의병들이 의기투합을 했으며, 서울 탈환을 위해 동대문 30리 밖까지 진격했다는 것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

독립기념관 앞에 만들어진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조형물.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독립기념관 앞에 만들어진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 조형물. 전병용 기자 yong126@msnet.co.kr

◆13도창의군 총대장 허위

1907년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고 군대가 해산됐다. 허위는 분노했다. "오직 싸워서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는 수밖에 없소. 새로이 보국을 결의합시다."

허위는 민긍호, 이강년 등의 의병부대와 연락하면서 경기도 연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대한제국 해산군인들의 참여도 늘었다. 전력이 현격히 보강됐다. 허위는 "이 가열한 기세를 몰아 서울로 진군하자"는 의견을 제안했다.

일본 군경과 전투를 벌이고 친일매국분자들을 처단하는 등 의병활동을 펼치던 허위는 이인영 의진 등 각지에서 활약하던 여러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을 취하며 대일항전에 보조를 같이하기 시작했다.

1907년 하반기는 한민족의 대일전이 격렬하게 전국적으로 급속히 파급되던 시기였다. 허위는 항일투쟁 경력과 의정부참찬을 역임한 전력 등을 배경으로 경기도 의병의 총수로 부상하면서 전국 의병전쟁을 주도했다.

일본은 허위를 의병의 '총수괴'로 표현했다. 허위는 이인영 부대를 주축으로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창의군을 결성하게 된다. 1907년 11월 전국 각지의 의병장들에게 의병부대를 통일해 연합의병부대와 통합사령부를 창설한 다음 서울을 향해 경기지방으로 진군하자는 격문을 발송했다.

"용병(用兵)의 요체는 그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 즉 각도의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를 타서 근기(近畿)에 범입(犯入)하면 천하(天下)를 들어 우리의 가물(家物)이 되게 할 수 없을지라도 한국의 해결이 유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허위는 연합부대의 서울진공작전을 결행하기에 앞서 서울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 의병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했다. 즉 의병전쟁은 고종황제의 칙령에 따른 대한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언문에는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 일본인의 잔혹한 만행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은 물론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군대를 격멸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전국 의병에 대한 호소문을 받은 의병들은 경기도 양주로 집결했다. 이때 모인 의병 수만 총 48진 1만여 명에 이른다. 허위의 경기도 의병 2천 명을 비롯해 강원도 민긍호 의병 2천 명, 이인영 의병 1천 명, 충청도 이강년 의병 500명, 황해도 권중희 의병 500명, 전라도 문태수 의병 100명, 평안도 방인관 의병 80명 등이다.

1908년 12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전국 의병장들이 통합 의병부대인 13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세우고, 관동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했다. 허위는 작전참모장 격인 군사장(軍師將)을 맡았다. 13도창의군은 즉시 서울진공작전에 돌입했다.

연합의병은 서울을 공격하는 데 있어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을사5조약 및 정미7조약을 파기하고 통감부를 몰아내어 국권을 회복하는 것과 의병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건설해 나라의 자주독립을 공고화 할 것을 주장했다.

◆서울진공작전

13도창의군은 조직을 갖춘 후 서울진공작전의 깃발을 올렸다. 서울 탈환작전에 들어간 것이다. 허위는 휘하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하도록 했다. 허위는 300여 명의 선발대를 이끌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했다.

두 달 동안 치열하게 전개된 탈환작전에서 허위는 300여 명의 군사로 선봉에 섰다. 이때 불행히도 뜻하지 않은 난관에 봉착했다. 후발 본대의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의 타계 소식을 듣고 집상(執喪)을 위해 고향인 문경으로 급히 귀향을 했다.

이인영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허위는 13도창의군의 총 지휘를 맡게 됐다. 이 급작스러운 일로 작전은 차질을 빚은 듯 잠시 혼란이 일었으나, 전열을 정비하면서 계획대로 진행하기로 하고 후속부대를 기다렸다.

13도창의군의 거침없는 진격에 일본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전정보를 입수한 일본은 서울 외곽의 방비에 전력을 기울였다. 양주 의병의 진로를 차단하고, 한강의 선박 운항을 일체 금지시켰다. 동대문에는 기관총까지 설치했다.

사정이 이러하자 13도창의군은 일본의 방어막을 뚫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허위의 선발대는 후발 본대가 도착하기 전 일본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화력과 병력, 기동력 등에서 열세인 허위 부대는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지만 패배하고 말았다. 뒤늦게 도착한 본대가 서울진공작전을 펼쳐보지도 못하고 작전을 중도에 포기한 것이다.

허위는 땅을 치며 분해했다. 의병군들은 서둘러 퇴각했다. 연합의병부대의 서울진공작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각 부대는 흩어져 독자적인 항전을 벌였다.

비록 서울진공작전이 실패로 끝났지만, 각지의 의병이 단일 부대를 만들어 서울 외곽까지 진격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큰 의의를 지닐 수 있으며,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서울진공작전 실패 후 허위는 임진강 유역을 중심으로 일본군 주둔지 습격, 전선 절단, 일본인 및 친일파 처단 등의 유격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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