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人&스토리] 대구 '원로문인' 도광의 시인

입력 2018-03-08 17:04:49 수정 2018-05-26 18:10:23

지극한 詩 사랑 54년, 그의 곁엔 시집 3권 단출

도광의 시인.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도광의 시인. 사진 이채근 선임기자 mincho@msnet.co.kr

한 국어교사가 있었다. 제자들이 펴낸 책의 판매 부수를 합치면 1천만 부가 넘는다고 한다. 문단에 이름을 올린 제자만 20여 명이다. 자신도 1965년 등단해 올해로 54년째 시인이다. 시인은 시를 짓는 사람인데, 어찌 된 탓인지 이 사람은 등단 이후 54년 동안 겨우 세 권의 시집을 내놓았다. 주무르고 깎다 보니 그렇다고 했다. 전 대구 대건고 국어교사였던 도광의 시인에 관한 이야기다.

◆시 쓰기가 가장 어렵네요

우리나라 문단에 시인은 많지만, 도광의 시인만큼 시력이 긴 시인은 드물다. 또 그렇게 오랫동안 시인으로 살아온 사람치고 도광의 시인만큼 과작(寡作)한 시인도 드물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54년 시작(詩作) 인생에 달랑 시집 3권을 냈으니 굳이 시인이라는 호칭이 필요할까 싶었다. 그러나 빛바랜 면바지에 콤비 재킷, 남색 베레모를 쓰고 새파란 운동화를 신고 나타난 그는 영락없는 시인이었다.

"너무나 많은 시인이 작품을 내놓고 있어요. 난해하거나, 호흡이 처지거나…. 나도 부담을 가지는데 독자는 오죽하겠어요?"

과작 시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시가 아무리 난해해도 어불성설이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읽는 사람도, 쓴 사람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난센스가 배출되는 시대다. 그는 "'실패한 은유'를 써놓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오만하게 '설'(說)을 풀어대는 시인을 여럿 봤다"면서 "아무리 어려운 시라도 의미의 언저리에 이미지가 닿아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 마지막 구절을 암송하고는 비둘기가 지붕 위를 걸어다니는 것을 고기잡이 배에 비유했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폴 발레리가 7, 8년에 걸쳐 시를 써내려갔듯이 다듬고 다듬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교단에 서던 시절 교과 진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제 흥에 겨워 쏟아내곤 했던 시론(詩論) 강의를 인터뷰 자리에서 기자를 앞에 두고 펼쳐내기 시작했다. 소월, 미당(서정주), 김춘수, 박용래, 한성기…. 그는 신문 인터뷰 기사로 적당히 이야기를 풀어내다가도 어느새 좋아하는 시인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그들의 작품을 줄줄 읊었다. 선물 보따리를 앞에 둔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 표정으로.

이야기하기가 조심스럽다면서 미당을 언급했다.

"친일 행적은 작품으로 보상했다고 해도 될 만큼 미당은 훌륭한 시인이오."

그는 마산고 재직 시절 미당의 시에 푹 빠져 "미당의 시를 모르면 속물"이라고 외치고 다녔다고 했다.

도광의 시인은 200편 정도의 시를 암기하며, 술자리에서 흥이 오르면 암송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 암송 리듬이 기막혀 귀를 쫑긋 기울이고 듣던 옆자리 손님들이 새 술 한 병을 건네기도 한다. 도 시인은 인터뷰 중에 한성기 시인의 '역'(驛)을 꼭 넣어달라고 당부했다. 우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시인의 자화상을 담은 시라고 했다. 그리고 차근차근 시를 되뇌었다. 가끔 고개를 저어가면서, 미간을 찌푸려가면서 얼른 떠오르지 않는 시구를 몇 번이고 반복하기도 했다.

"자꾸 잊어버리네. 요새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갑골길' 외에 '저녁답' '하양의 강물 2' '하양의 강물 3'에 애착이 간다고 했다. '갑골길'을 쓰도록 한 것은 절박한 상황과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었다.

"마산고에서 근무할 때였어요. 경남 함안에서 한하균 선생을 만나고 술에 취해 밤새 눈길을 걸어왔어요. 새벽녘 북마산 파출소 다다미방에 도착해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깼는데 성에 낀 유리 너머 황량한 합포만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편찮으신 어머니 생각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그 순간 떠오른 구절을 벽에 옮겨 적었는데, 그걸 대건고에서 근무할 때 완성했으니 몇 년이 걸린 건지…."

그렇게 완성된 갑골길은 그의 대표작이 됐다. 그러나 도광의 시인은 여전하다.

"일관된 흐름으로 시를 쓰기가 참 어렵습디다."

◆교과서 밖 감수성

196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마산고와 마산 창신고를 거쳐 1971년 대구 대건고에 부임했고, 1997년 효성여고에서 교사 생활을 마쳤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를 국어교사보다는 문예반 지도교사로 기억하는 것 같다. 수업 시간에는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시를 읊었고, 문예반 학생의 이름은 수십 년이 지나도 잊지 않는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진도를 나가면 시원찮게 가르치니 학생들 항의를 많이 받았어요."

미당에 빠지고, 술에 빠져 지낼 때였다. 자정이 넘도록 술을 마시고 교과 준비도 없이 출근하던 때가 있었다. 과음은 예삿일이었고, 숙취를 푸느라 교탁에 주전자를 놓고 물을 들이켜 '금붕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동료 교사들은 수업시간에 가르치라는 건 안 가르치고 딴 것만 가르친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교과서에 나오던 신경림의 '농무'보다 '제삿날 밤'이 더 좋았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좋아 통째로 외웠다는 그다. 수업 시간에도 교과서는 뒷전이었으니 학교는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런데 대학 본고사를 치르고 온 학생들이 그의 수업을 듣고 시험을 잘 봤다고 했다.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교감은 도리어 그를 칭찬했다. 어쩌면 족집게 교사였을까.

"지금 와서 생각해도 그들에게 가르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배운 게 더 많아요."

대건고 28회 문예반 제자들의 출판기념회에서 축사했다. '분홍(粉紅) 풀색'이라는 시를 들려줬다. 외상 술값을 받으러 온 식당 주인은 술만 마시고 학생들을 돌보지 않았던 과거를 돌이켜보게 했다.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데 대한 죄책감에서 쓴 시였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제자들은 모일 때마다 도광의 선생님을 이야기한다.

"나는 운이 참 좋은 사람입니다. 그 녀석들이 '그 시 좋습니다'하면 용기를 내서 더 잘 쓰고 싶어지지요."

그들에게 잊지 않고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 아끼는 제자이자 문예반장이었던 시인 안도현이 고3 때 원고 뭉치를 가져왔을 때도 했던 말이다.

"시는 길면 안 된다. 언어는 보석처럼 갈고 다듬어야 한다. 언어를 함부로 부도내지 마라."

등단한 제자만 20명이 넘는다. 시인 서정규'안도현'이정하'권태현, 소설가 겸 시인 박덕규, 소설가 김완준. 한 스승 밑에서 이렇게 많은 문인이 배출된 건 이례적이다. 여기에 번역가, 기자, 교수 등 글로 먹고사는 제자를 합치면 셀 수도 없다.

"비결이요? 감수성이 아닐까요?"

◆로맨티시스트를 말하다

"로맨티시스트, 그건 날 놀리려고 하는 말 같아요."

제2대 대구문인협회장 출마 당시를 떠올리며 자신도 철저한 리얼리스트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을수록 숨길 수 없는 로맨티시스트다.

시인 도광의를 이야기하며 술이 빠질 수가 없다. 그리고 술 하면 외상값이 빠질 수 없다. 월급날, 방학하는 날이면 술값을 받으려고 교문 앞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식당 주인을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나이가 들어 예전만 못하지만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술자리를 찾는다. 아니, 그가 있는 곳에 술과 사람이 모여든다.

"술을 마시면 시가 떠올라요. 그러니 시 없는 술, 술 없는 시는 생각하기 어렵겠지."

인터뷰를 끝낸 그와 단골집에 갔다. 자정까지 술을 마시지는 않겠다던 그였다. 빈 술병이 탑을 쌓았다. 백발이 성성한 시인의 낭만시계는 인터뷰가 시작될 때 이미 멈춰 있었다.

취기가 올라도 시를 잊지는 않는다. 잠들기 전 머리맡에는 400자 원고지와 볼펜이 있다. 그러지 않고서는 좋은 시가 안 나온다.

그는 등단 후 18년 만에 첫 시집 '갑골길'을 냈고, 그로부터 21년 뒤에 두 번째 시집 '그리운 남풍'을, 다시 9년 뒤인 2012년에 세 번째 시집 '하양의 강물'을 펴냈다. 그리고 침잠이다.

"상 좀 못 받으면 어떤가!"

마지막일지도 모를 네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55년 전 처음 썼던 '포플러'의 마지막 구절을 이제 완성했다. 고치고 다듬은 시는 파닥인다. 발랄하다. 그는 "나이가 들수록 시는 젊어야 한다. 다 처져 빠진, 무미건조한 시를 쓸 바엔 안 쓰는 게 낫다"면서 "대구에서 시를 소중하게 갈고 다듬어 문학을 손상하지 않으려는 시인은 송재학"이라고 거듭 말했다.

시가 아닌 것을 가르치면서 시론 강의를 하는 세상이다. 아무도 공감하지 않는 시를 내놓고 시라고 떠든다. 그에게 시는 고투하고 다듬어서 내놓느라 오래 걸려야 한다.

"내가 독자가 되는 작품을 쓰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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