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취재 현장 중 하나는 2003년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다. 8월 21일부터 31일까지 대구시를 비롯해 경상북도 7개 시'군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527명의 북한 선수단과 응원단이 참가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되돌아보면 전 국민의 관심을 끈 미녀응원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무적의 팀'으로 불리며 금메달을 목에 건 북한 여자 축구팀의 우승 소감(김정일 위원장님께 승리의 보고를 한 것 같아 기쁘다. 우리 선수들은 단고기를 많이 먹어 체력이 좋다)과 북한 선수단을 이끈 전극만 총단장(조선대학체육협회 위원장)의 모습도 머리에 남아 있다.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세계 3대 스포츠 종합대회의 하나인 유니버시아드인데, 대학생들의 열기 넘친 스포츠 현장 대신 북한 참가자들의 모습만 떠오르는 건 서글픈 일이다.
당시 대회 폐회식을 앞두고 인터불고호텔에서 전극만 총단장을 인터뷰했다. 이른바 단독 취재였다. 공식적인 이별에 앞서 전 총단장 일행 4명과 박상하 대구 유니버시아드대회 집행위원장이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로, 밀실 회의였다. 대구 영진전문대와 평양 김철주사범대학 간의 여자 축구 교류를 하자는 박 집행위원장의 제의에 전 총단장은 "이번 대회를 통해 유대가 깊어진 만큼 돌아가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본다. 실무진을 통한 구체적인 협의가 가능할 것이다"고 했다. 이후 대구 조직위원회와 북한 사이에는 구체적인 협의가 없었는데, 걸림돌이 있었다. 컴퓨터와 버스 등을 지원해 달라는 북측의 요청을 대구시가 거부, 추가 협의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2003년은 노무현 정권 첫해로 남북 간에 해빙 무드였지만 대구시는 보수적인 지역 정서를 무시할 수가 없었다.
추억이 된 북한과의 교류가 내달 9일 개막하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다시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동계올림픽을 매개로 한 이번 남북 교류는 역대 최고 수준이 될 전망이다. 선수와 임원으로 구성한 선수단, 기존의 미녀응원단뿐만 아니라 민족올림픽위원회 대표단, 관현악단, 태권도시범단, 기자단 등이 포함돼 있다. 선수단은 20명 안팎 소규모로 구성하겠지만 관현악단은 140여 명, 응원단은 230명이라고 한다.
피맺힌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아들을 최전방 GP에 둔 부모로 남북의 화해 분위기가 더없이 반갑다. 그런데 가슴속 찜찜함을 지울 수 없다. 오랜 기간 스포츠 현장을 취재하면서 스포츠가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면서 상처받는 모습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축구'탁구 등 구기 종목의 남북한 단일팀 구성, 부산아시안게임과 대구유니버시아드대회 때의 미녀응원단 파견 등을 통해 남북이 화해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깜짝 쇼'나 일회성 행사에 그쳤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교류였지만 냉정히 보면 뚜렷한 결과물은 없다. 당시 정권의 이념적인 성향과 코드에 따라 남북이 정치적으로 스포츠를 잠시 이용했을 따름이다.
이번에도 남북의 정치적인 셈법은 맞아떨어지고 있다. UN의 경제 제재로 궁지에 몰린 북한은 돌파구로 평창동계올림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권은 앞선 김대중'노무현 진보 정권과 마찬가지로 남북 대화와 교류를 통한 안정적인 정권 유지를 꾀하고 있다.
달라진 점은 이전과는 달리 국민 다수가 정부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인 지원(퍼주기)을 견제하는 점이다.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스포츠로 조성한 화해 분위기 속에 '퍼주기'를 한 것이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국민은 알고 있다. 이번에도 북한은 평창동계올림픽으로 화해 분위기를 조성한 뒤 다양한 요구를 할 것으로 보인다. 우리 정부 또한 이런 분위기에 편승할 가능성이 있다. 그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조성한 화해의 판은 깨질 것이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평창대회 후 의연히 대처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댓글 많은 뉴스
이재명 90% 득표율에 "완전히 이재명당 전락" 국힘 맹비난
권영세 "이재명 압도적 득표율, 독재국가 선거 떠올라"
이재명 "TK 2차전지·바이오 육성…신공항·울릉공항 조속 추진"
대법원, 이재명 '선거법 위반' 사건 전원합의체 회부…노태악 회피신청
국정원, 中 업체 매일신문 등 국내 언론사 도용 가짜 사이트 포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