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대용 마지막 주월(駐越) 공사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접했다. 그는 사이공(호찌민)이 함락되는 위기 상황에서 미 대사관의 탈출 권고를 무시하고 교민 175명의 안전을 책임졌던 지도자였다. 공산 월맹군에 체포된 그는 혹독한 감옥살이를 이겨내고 5년 만에 반쪽이 된 몸으로 귀환한다. 잘 알려진 이런 덕담과 달리 그가 6'25전쟁에서 지휘관으로서 보였던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예비역 육군 준장인 그가 지난 11월 14일 92세로 영면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6'25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살아난 그의 명언을 옮겨본다. "전쟁 때는 무구(無垢)의 정신으로 굵고 짧은 삶을 값있게 살다가 화사한 꽃이 떨어지듯이 가버리는 것이 군인의 일생이라고 했어요." 그는 6'25전쟁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우리 중대(제6사단 7연대 1대대 1중대)가 1950년 10월 26일, 맨 먼저 압록강에 도달한 것이지요. 인민군들이 뗏목다리를 건너 중국으로 도망쳤어요." 그러나 10월 28일 초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중공군과 열세 번이나 교전을 벌였다. 어떤 부대는 민간인복으로 갈아입고 후퇴했지만, 그의 중대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군인은 총칼을 버릴 수 없다. 사즉생(死則生)이다. 마지막 총알 한 발은 자기를 위해 써라"라고 말했다.
군인으로서 뛰어난 지휘능력도 돋보이지만, 내가 그를 주목하고 존경하게 된 것은 6'25전쟁을 통틀어 최고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언급하는 대목이다. 그는 직속상관인 김용배 대대장을 최고의 군인이었다고 언급했다. 김용배는 천재적인 전략가였고, 용감했고 인격적으로 훌륭했다는 것이다. 적의 총알이 이마를 스쳐 피가 뚝뚝 흐르는데도 '별거 아니야'라며 태연했다고 한다. 특별히 인격적으로 훌륭했다는 그의 말을 증명하는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목이 메었다. 이대용이 낙동강 전선에서 죽음을 떠올리며 사수할 때, 김용배 대대장이 "압록강 대장(제1중대장의 음어), 압록강 대장! 추위와 굶주림이 얼마나 심하오. 부족한 나를 용서하오"라며 무전을 보내온 것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한 번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지만, 그때는 무전기를 잡은 채 흐느껴 울었다고 한다. 절박한 순간을 맞아 30살의 대대장이 25살의 중대장에게 보낸 격려와 응원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인격적이고 훌륭했던 그 대대장이 제7사단 5연대장으로 승진'부임 후, 1951년 7월 양구 전투에서 서른하나의 나이로 전사했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 김용배 장군(대령이었으나 추서 계급 준장) 외에, 이름 없이 사라져간 무명의 장병이 남긴 전우애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대용 압록강 대장과 그의 직속상관 김용배 대대장의 전우애를 우리 사회의 미담으로 소개하고 영원히 회자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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