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1,2,3권/ 박지원 지음/ 김혈조 옮김/돌베개 펴냄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흔히 '조선 시대 최고의 여행기' '조선 최고의 명문장'이라는 찬사가 따른다. 하지만 18세기 조선시대 점잖은 사람들의 평가는 달랐다. 일부 지식인들은 열광했지만 다수의 조선 선비들에게 '열하일기'는 내놓고 보기 민망한 '빨간책'이었다.
박지원은 1780년 열하 여행을 다녀온 뒤 3년에 걸쳐 '열하일기'를 완성했다. 박지원이 자신의 초고를 검열하는 동안, 필사본들이 먼저 나왔고 여기에는 필사자들의 시각이 가미되기 일쑤였다. 이 책 '열하일기 1,2,3'은 '박지원본'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정벌해야 할 나라, 배워야 할 나라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팽배했다. 후금, 즉 청나라 황제에게 국왕 인조가 굴욕적인 항복을 했고, 세자와 왕자들을 비롯해 많은 신하들이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수만 명의 민간인들 역시 청나라의 노예나 성노리개로 끌려가 갖은 고생을 다하며 삶을 마쳤다.
조선 사람들에게 청나라는 원수의 나라였다. 항복 후 형식적으로는 사대 외교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문화적 우월감 속에서 청에 대한 북벌을 준비했다. 북벌은 오랫동안 조선의 정치 사회를 지배하는 이념으로 자리 잡았다.
한양에서 태어났으나 황해도 금천의 연암골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박지원(1737~1805)이 다시 한양으로 돌아온 것은 1780년(정조 4)이었다. 그해 5월 삼종형 박명원이 고희를 맞은 청나라 건륭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는 진하(새해나 중국 임금의 생일에 중국으로 사신을 보내 축하하는 일) 겸 사은사(謝恩使)의 정사로 사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박지원은 박명원의 개인 수행원 자격으로 사행길에 동행했다.
1780년 6월 압록강을 건넌 뒤 북경을 거쳐 열하, 그리고 다시 북경을 거쳐 10월 말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박지원은 신세계를 보았다. 열하는 청나라 건륭황제가 별궁을 건설한 곳으로 북경에 버금가는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박지원은 사행 기간 동안 청국의 학자를 비롯해 몽골과 티베트 사람들과 교류하며 그들의 학문과 문화를 접했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한양으로 돌아온 뒤에는 몇 년의 작업 끝에 지금까지 오랑캐로만 치부했던 청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발전상을 소개하며 북학론을 개진한 역작 '열하일기'를 발표했다. '열하일기'는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에 있어서도 당시로는 파격적이고 직접적이며 해학적이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문체, 당시로는 '빨간색'
알려진 대로 박지원의 '열하일기' 문체는 살아 펄떡인다.
'일행이 고려보에 이르렀다. 집들은 모두 띠풀로 지붕을 이었는데, 아주 빈한하고 검소하여 묻지 않아도 고려보인지 알겠다. 병자호란 다음 해인 정축년(1637)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끼리 한 마을을 이루고 사는 곳이다. 산해관 동쪽 천여 리에 걸쳐 논이라곤 없더니, 홀로 이 땅에만 벼를 심고 있으며, 떡과 엿 따위가 본국 조선의 풍습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옛날에는 사신이 오면, 하인배들이 사 먹는 술과 음식의 값을 혹 받지 않기도 하고, 부녀자들도 내외를 하지 않았으며, 어쩌다 고국의 이야기가 나오면 눈물을 흘리는 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말몰이꾼들이 이를 악용하여 마구잡이로 술과 음식을 공짜로 먹는 자가 많이 생기고, 혹 따로 그릇과 의복까지도 억지를 부리며 달라고 하는 자까지 있었다. 같은 나라의 옛 정리를 생각해서 주인이 지키는 것을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으면, 그 틈을 노려 물건을 훔치기까지 했으니, 이 때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을 더욱 싫어하게 되었다.
매번 사행이 도착하면 술과 음식을 감추고 기꺼이 팔지 않으려 하고, 간절하게 요구해야 마지못해 팔긴 하지만 바가지를 씌우고 혹 값을 먼저 치르라고 한다. 이렇게 되자 말몰이꾼들도 반드시 온갖 꾀를 동원하여 사기를 쳐서 분풀이를 하니, 서로 간에 상극이 되어 원한이 깊은 원수를 보듯 한다.-1권 409~410쪽-
◆방대한 내용…옮긴이, 5가지 주제에 주목
'열하일기'는 방대하다. 내용이 너더분하고 지엽적이며, 지루한 부분도 많다. 전고(典故)나 음악, 시화, 우주론 등을 전문적으로 다룬 부분도 있다. 때때로 잡다하게 보이는 부분까지 연암의 치밀한 의도에 의한 것이지만, 독자들 입장에서는 독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옮긴이 김혈조 교수는 이 책 번역에서 크게 5가지에 주목하고 있다. 첫째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정보다. 조선 선비들에게 '열하일기'에 수록된 방대한 내용은 그 자체로 새로운 정보였다. 조선을 벗어나 청나라에 입국한 뒤 북경에 이르기까지의 견문과 열하 지방에서의 체험은 조선 선비들에게 훌륭한 정보이자 읽을거리였다.
둘째는 선진 문화문물을 배우자는 '북학'(北學)이다. 연암은 당시 평범한 선비들처럼 청나라를 북벌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고, 중국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그에게 청나라는 조선의 낙후한 문화와 만성적 빈곤을 타개할 수 있는 배움의 대상이었다.
셋째는 '천하대세에 대한 전망'이다. 당시 세계의 중심부였던 중국 천하의 변화는 곧 주변부였던 조선의 정세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연암은 중국의 통치 현실을 비판적 시각으로 통찰하는 한편, 천하가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를 예의주시했다.
넷째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인간 유형에 대한 묘사와 인물형상이다. 역사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간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행동하는가를 관찰하고 묘사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을 전망하려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책 '열하일기'에는 최고 통치자 황제에서부터 종교 지도자, 고위관료, 정치적 실세, 지식인, 하급관료, 서민대중, 하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간들의 행동양태가 그려져 있다.
다섯째는 선비, 즉 지식인의 역할과 처신에 관한 문제다. 선비란 독서하는 사람인데, 선비의 사회적 역할은 독서내용을 실천하는 데 있다. 연암은 "조선의 지독한 가난은 따지고 보면 그 원인이 전적으로 선비가 제 역할을 못한 데에 있다"고 말한다. 연암은 선비들이 독서로 습득한 지식을 이용후생으로 연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북학은 이용후생의 길이었다. 그는 당시 중국의 선진 문물을 배우고 실천하고자 했던 북학의 선두 주자였다. 이 책은 위의 다섯 가지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1권 559쪽, 2권 544쪽, 3권 581쪽, 각권 3만원.
▷지은이 박지원은….
박지원은 조선 후기의 저명한 문학가이고 실학파 학자로, 자는 중미(仲美), 호는 연암(燕巖)이다. 재야의 지식인으로 당파와 신분을 초월하여 인간관계를 형성하였으며, 특히 선비 곧 지식인의 자세와 역할에 대해 일생 동안 깊이 고민하고 성찰했다. 그의 산문은 중세적 사유의식을 떨쳐버리는 작품이 대부분이다. 특히 44세(1780년)에 중국을 여행하고 지은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 큰 영향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세계 고전사에 남을 기념비적 저술이 되었다.
▷옮긴이 김혈조
김혈조는 성균관대 한문학과에서 '연암 박지원의 사유양식과 산문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2년부터 영남대 한문교육과에 재직하며 한국한문학의 산문 문학, 특히 연암의 산문 문학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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