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신문 속 여성] 식모

입력 2017-11-07 00:05:00

큰할아버지 댁은 과수원이었다. 어릴 적 놀러 가면 '미영'이라는 언니가 우리와 같이 놀아주곤 했다. 그 언니는 작은 골방에서 지냈다. 밥때가 되면 밥을 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했던 그 언니는 '식모'였다. 내가 조금 더 자란 어느 날 그 언니가 집을 나갔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들었다. 어쩌면 그 언니는 그 시절 우리가 목도한 마지막 '식모' 세대가 아니었을까.

가난한 농어촌에서 취직을 위해 무작정 상경하는 여성이 많았고, 가난한 집에서는 '입 하나 덜자'는 마음에 어린 여성을 다른 집 식모로 보냈을 터이다. 낯선 도시에서 여성들이 거주지와 식비 문제를 해결하며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직업 중 하나가 식모였을 것이다.

1935년 신문(동아일보 1935년 10월 8일)에는 "우리 가정을 위협하고 있는 큰 문제"로 '식모 문제'를 들고 있다. 요약하자면 식모를 구하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일본 내지 사람들 가정에서도 조선 식모를 고용한 모양이다. 싸고 일을 잘하니 말이 통하지 않아도 조선 사람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기사에서 당시 식모의 월급은 3~5원 정도이며 식모 밥값은 8원 정도로 계산하고 있다. 식모에게는 휴일도 없다. 이 기사는 식모가 다른 집으로 옮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 나름의 복지를 제안하고 있는데, "일한 만큼 보수를 주고 한 달에 적어도 하루 이틀은 휴일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식모'를 소재로 한 영화들도 있다. 영화 '식모'(1964), '식모의 유산'(1969)은 당시 식모살이를 다양한 시각으로 보여주고 있다. 딸이 집 나간 아버지를 찾아 아버지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기도 하고, 주인 남자의 아이를 낳기도 한다.

그렇다면 식모는 어떻게 불렸을까. 1972년 신문(동아일보 1972년 3월 27일)에는 식모를 부르는 말로 "수고언니, 언니, 가정부, 아줌마, 또순이, 왈순아지매" 등이 있으며 하는 일에 따라 "유모, 침모, 찬모, 부엌이, 반빗아치, 안잠자기, 드난살이, 행랑어멈"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하지만 많은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식모는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1937년 신문에는 "노동자들 중에 제일 많은 일을 하고 제일 적은 보수를 받는 노동자는 식모이고 제일 불쌍한 것도 식모 생활"이라고 적고 있다. 하루 15시간이 넘는 노동시간에 때로는 억울한 일도 당한다. 또 다른 신문에는 식모 '김 양'의 사연이 실렸는데, 집주인 여성이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쌀이 많이 없어지고 다이아 반지가 없어졌다면서 김 양에게 밤낮으로 송곳, 칼 등으로 찌르고 부젓가락으로 지지는 등 악행을 해 결국 숨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가장 약자로, 밤낮 노동에 시달렸던 '식모'의 마지막 모습이 너무나 처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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