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생명을 품은 성주] <3>세조의 왕위 찬탈에 의해 파헤쳐진 다섯 왕자 태

입력 2017-11-07 00:05:00

왕위 찬탈 성공 수양대군, 반기든 다섯 왕자 태 불태워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태실이 파헤쳐진 다섯 왕자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태실. 현재 태 항이리 등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태실이 파헤쳐진 다섯 왕자 안평대군,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 태실. 현재 태 항이리 등은 없고 흔적만 남아 있다.

1452년 5월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자, 아들 단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어린 임금이 즉위하면 가장 서열이 높은 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지만, 수렴청정할 대왕대비가 없었다.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가 단종을 낳은 다음 날에 산욕열(産褥熱)로 죽었기 때문이다.

◆왕자들의 태실을 파헤치다

단종은 영의정 황보인(皇甫仁)과 우의정 김종서(金宗瑞)를 대전으로 불렀다. "나를 지켜줄 분은 두 분뿐이오. 그대들이 내 옆에서 나를 굳건히 지켜주시오." 문종의 유명을 받은 황보인과 김종서는 "전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지켜 드리겠습니다. 심신을 굳건히 하십시오"라고 아뢰었다. 그러나 어린 단종이 즉위하면서 왕권은 풍전등화에 놓였다. 당시 사관(史官)은 "왕은 손 하나 움직일 수 없는 괴뢰적인 존재로 전락하고 백관은 의정부가 있는 것은 알았으나, 군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 지 오래 되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왕권이 미약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종의 둘째인 수양대군과 셋째인 안평대군은 서로 세력 경쟁을 벌였다. 두 사람은 성격이 아주 달랐다. 수양대군은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주위에 문무에 뛰어난 문객을 많이 모은 반면, 안평대군은 정치적인 관심보다는 문학'예술을 좋아해 이 방면의 동호인들과 어울렸다.

단종 즉위 후 2개월이 지난 1452년 7월 권람은 밤이슬이 내려앉는 깊은 시간 수양대군의 집을 찾는다. 권람은 "대군, 김종서가 정권을 장악하고 반역을 꾀하고 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조가 무너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김종서를 치고 대군이 용상에 앉으셔야 합니다"라고 했고, 수양대군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다. "진정, 그대가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겠는가?" 그러자 권람은 자리에서 일어나 수양대군에게 큰절을 한다.

수양대군은 대권에 야심을 품고 권람'홍윤성(洪允成)'한명회(韓明澮) 등을 심복으로 만들었다. 신숙주를 막하에 끌어들이는 한편 홍달손(洪達孫)'양정(楊汀) 등의 심복 무사를 비밀리에 양성해 거사 준비를 착착 진행했다.

1453년 10월 10일 달빛조차 없는 밤, 검은색 변복을 하고 칼을 찬 날렵하게 생긴 무사들이 떼를 지어 수양대군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그 수가 1천여 명에 달했다. 드디어 수양대군은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김종서를 철퇴로 쓰러뜨렸다. 그리고 황보인'조극관(趙克寬)'이양(李穰) 등 여러 대신을 왕명으로 밀소(密召)하여 궁문에서 퇴살(推殺)했다. 궁에는 10여 일 동안 피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안평대군은 강화도에 안치했다가 사사(賜死)했다.

계유정난(癸酉靖難) 후 수양대군은 1455년 왕위에 오른다. 바로 세조다. "단종을 폐위시키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시켜 강원도 영월(寧越)로 유배를 보내거라." 세조는 어명을 내렸다.

즉위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폐위된 어린 왕 단종은 서인(庶人) 신세가 됐다. 단종이 유배를 떠날 때 단종의 태(胎)를 받았던 내의녀 영이와 단이도 뒤를 따랐다. 세조는 의금부도사를 부른다. "의금부도사는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경상도(慶尙道) 성주목(星州牧) 선석산(禪石山) 태실을 찾아가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한남군, 영풍군, 화의군의 태실을 모두 파헤치거라."

이들은 모두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했었다. 다음 날 의금부도사는 군사 100명을 데리고, 경상도 성주목으로 떠났다. 1458년 8월 초 장마가 한창일 때 의금부도사 일행은 경상도 성주목 선석산에 도착했다. 장대 같은 장맛비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내렸다. "하늘도 슬퍼하는구나!" 의금부도사는 속으로 읊조렸다.

◆깨져버린 다섯 왕자의 태항아리

잠시 머뭇거리던 의금부도사는 명을 내렸다. "지금부터 대역죄인 안평대군과 금성대군, 영풍군, 한남군, 화의군의 태를 파내거라." 서슬 퍼런 의금부도사의 명이 떨어지자 역군 30여 명은 곡괭이와 정, 망치 등으로 왕자들의 태가 묻힌 태실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돌이 곡괭이와 망치에 부딪치는 소리가 선석산에 울려 퍼졌다.

역군들의 몇 번의 곡괭이질에 다섯 왕자의 태항아리는 그대로 깨져버렸다. 머리에 수건을 동여맨 역군 마 씨가 망치질하다가 한마디 던진다. "왕자들도 참 허무하구먼. 왕위를 빼앗은 것에 대해 반대했다고 부관참시도 아니고, 태까지 파헤쳐지는 것은 우리보다도 더 못하구먼." 의금부도사의 불호령이 떨어진다. "다섯 왕자의 태를 파헤치는 것은 전하의 어명이시다. 한눈을 팔아서는 안 될 것이다. 빨리 서둘러라."

깨진 돌과 태항아리 조각들은 산비탈로 굴렸다. 돌이 굴러 떨어지면서 잡목들이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골자기 밑에는 다섯 왕자의 태실에서 나온 돌과 태 항아리 조각들이 어지럽게 나뒹굴었다.

역군들은 태항아리에서 태를 꺼냈다. 항아리 속에 든 다섯 왕자의 태를 빼내어 한쪽에 피워 둔 모닥불에 던졌다. 비에 나무들이 젖어서인지 매캐한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선석산 태봉 주위를 맴돌 뿐이다. 역군들은 태항아리가 들어 있던 구덩이를 흙으로 메웠다. 태를 불사른 구덩이도 흙을 덮어 다졌다.

가지런히 줄지어 있던 왕자들의 자리가 군데군데 비었다. 마치 이빨이 듬성듬성 빠진 것처럼 보였다. 새벽부터 시작한 다섯 왕자 태실을 파헤치는 것은 오후 늦게 끝이 났다. 태봉을 내려다보고 있는 옆 소나무 꼭대기에는 까마귀 한 마리가 날아가지 않고 '까악! 까악!' 울어댄다. 마치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는지 어찌 저리 구슬피 울어대는지.

다섯 왕자의 태를 파헤친 의금부도사는 법림산(法林山)에 있는 노산군(魯山君·단종)의 태봉을 철거하러 몰려갔다. 단종의 태가 파헤쳐진다는 이야기를 들은 영이와 단이는 결심했다. 영이와 단이는 대전(大殿)의 내의녀였다. 영이와 단이는 목숨을 버릴까 하는 생각을 했다. 모셨던 단종이 저승길을 홀로 간 마당에 주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지만, 그전에 꼭 할 일이 있었다. 영이는 "단아 우리 손으로 받았던 단종의 태를 꼭 되찾아 고이 묻어주고 그다음에 우리도 따라 죽자"고 했고, 단이도 결심의 눈빛을 보냈다. 그렇게 영이와 단이는 도성을 떠나 경상도 성주목으로 향했다.

여인들의 발걸음이 빠르지 않은 탓에 경상도 성주목까지 두 달이나 걸렸다. 그렇지만 이미 늦었다. 의금부도사들이 이미 단종의 태를 파헤쳐버린 것이다. 태를 묻은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영이와 단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부둥켜안고 울었다. 둘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조선의 장태문화

조선 왕실의 풍속 가운데 특별한 행태를 가진 것이 태를 묻는 장태의식이다. 태는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으로 출산 뒤에도 소중하게 보관했으며, 특히 왕실의 태는 국운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더욱 소중하게 다뤄졌다.

태실(胎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성주에는 모두 3곳의 태실지가 있다. 월항면 인촌리의 세종대왕자 태실과 가야산 북쪽 자락인 가천면 법린산의 단종태실, 용암면 대봉리의 태종대왕 태실이 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 후 마당을 깨끗하게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했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 방법으로 처리했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태실도감에서는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또한 왕의 태실인 태봉(胎封)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하면 왕의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加封碑)를 세운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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