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나와 충무공 이순신 제독

입력 2017-10-20 00:05:04

지난 학기에 이어, 가을 학기에도 대학연계 대구시민대학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막하 인물들의 리더십'을 강의하게 되었다. 우리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매주 2시간씩 8주 동안 강의하고 있다. 천학비재한 나의 강의를 경청하며 성원을 보내 주시는 시민들과 학생들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다.

나와 충무공(忠武公) 이순신 제독(李舜臣 提督)의 만남은 우연보다는 필연이다. 내 이름은 물과 관련이 있다. 규택(圭澤)은 흙이 물을 감싸니 못이나 바다의 형상이다. 내가 해군에서 복무한 것도 나의 이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굳이 '충무공 이순신 제독'이라 표기함은 충무공이란 시호를 받은 인물이 12명이나 되고, 진주성 전투의 영웅인 김시민 장군의 시호도 충무공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명이인 등림수(登臨守) 이순신(李舜臣)과 이 충무공의 부하였던 무의공(武毅公) 이순신(李純信)과도 구별하기 위함이다.

32세의 공(公)은 선조 9년(1576년) 식년시 무과(武科)에 응시하여 병과(丙科) 4등, 전체 29명 가운데 12등으로 합격한다. 공은 선조 13년에 전라좌도의 수군만호(水軍萬戶)인 발포만호(종4품)를 거쳐, 선조 19년에도 함경도 두만강 부근의 여진족 접경지였던 조산보(造山堡) 만호가 된다. '경국대전'에 조산보가 함경도에 있는 유일한 수군기지라 기록하고 있다. 공은 선조 24년(1591년 2월), 일약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정3품, 堂上官)로 승진한다. 왜란이 일어나기 불과 14개월 전이이었고,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이처럼 공의 주요 벼슬은 모두 수군에서 이루어진다.

나는 초등학교 시절 '성웅 이순신'이란 위인전을 읽으며 전쟁을 낭만적으로 생각했고, 나도 이 충무공 같은 군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그러다 중학교 2학년 때 통영으로 수학여행을 갔다. 난생처음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한산도에서 공의 영전에 예(禮)를 표했다. 기분이 묘했다. 그것이 1977년이었고, 만 10년 만인 1987년에는 일흔아홉 번째 해군사관후보생이 되었다. 올해가 2017년이니 정확히 40년 세월을 나와 공은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다.

나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와 공의 만남이 필연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공의 위국헌신(爲國獻身)하신 자취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흉내 내고 이를 실천하고자 부단히 노력할 수 있겠는가! 나는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공께서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각오로 위기를 극복하신 경우를 생각한다. 그런 심정으로 이 혼란한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를 공에게 묻게 된다. 공과 같은 공직자가 정작 나타나야 한다고 간절히 기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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