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레…제3회 매일시니어문학상 수필 특선-신송우

입력 2017-10-10 13:49:17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린다. 적색 신호를 무시하고 태연하게 건너는 청년이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심기가 불편해진다. 내가 교직의 책무를 다하지 못하여 일어난 것 같아 마음이 찜찜하다.

퇴임하고 파크 골프를 배웠다. 모임의 회원들이 선생님이라 불렀다. 왠지 선생님이란 호칭이 굴레처럼 느껴졌다. 오랫동안 선생님이라는 직업과 호칭에 눌러온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싶었다. 지금까지 선생님으로 살았는데, 여기서도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다면서 '선생님' 대신 '대표'로 불러 달라고 했다. 모두가 한바탕 웃음과 박수로 화답해주었다. 흔쾌한 마음으로 그날 밥값을 주저 없이 치렀다. 그 뒤부터 골프 모임에서만큼은 '선생님'이라는 굴레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잔디 구장에서 삼복더위도 잊은 채 삼삼오오 공을 치고 있었다. 따가운 햇볕을 피하느라, 얼굴에 선크림을 하얗게 발랐다. 머리에는 수건을 덮어쓰고 그 위에 모자까지 눌러썼다. 땀범벅이 되었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한차례 라운딩을 하고 휴게실에 들어갔다. 휴게실에는 다른 클럽 회원들로 북적거렸다.

지난번 파크 골프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는 다른 클럽회원인 A가 슬금슬금 다가왔다. 내 골프채를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지난 대회에서 잃어버린 자기 것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게다가 A가 속한 골프클럽의 임원이 그쪽 편을 거들고 나섰다. 모두가 단박에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도둑으로 내몰렸다. 맑은 날에 벼락을 맞은 꼴이 이럴까. 얼굴이 화끈거리고 울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고함을 지르며 욕을 하고 싶었지만, '선생님'이라는 굴레가 가로막고 나섰다.

폭발하려는 마음을 억지로 가라앉히는 참에 경찰관이 들어왔다. 골프클럽 측에서 일이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아서 신고한 것이었다. 경찰관은 여러 사람에게 정황과 이야기를 다 듣고서는 나에게 의심을 두는 듯했다. 교직 생활 삼십여 년을 거론하며 그렇지 않다고 항변했다. 그러자 경찰관은 그 클럽 임원에게 내 골프채를 잘 보관하라며 건네며 주었다. 누가 주인인지 판명이 나면 그때 돌려주라는 말을 남기고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소문은 파크 골프장을 찾아온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하여 자꾸 번져갔다.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보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사건이 쉽게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둑으로 내몰린 그 날 자리에 없었던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전화했다. 골프채 분실사건의 자초지종을 알렸다. 친구는 전화를 끊고 기다려보라고 하더니, 잠시 후에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골프채가 자기 것이 아니라고 했다.

밤잠을 설치며 고민에 빠져있던 터라 당장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파크골프 대회 날에 친구 골프채가 내 것과 바뀐 것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매미가 어두운 땅속을 기어 나와 두꺼운 껍질을 탈출하여 푸른 하늘을 날아가는 기분이 이럴까.

골프채를 보관하고 있는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나와 내 친구의 골프채가 바뀐 것임을 설명하고, 골프채를 돌려달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클럽 임원은 A의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관련 있는 사람이 모두 한자리에서 만나서 해결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친구는 자기 골프채에 회원 일련번호를 클럽에서 정해진 자리가 아니고 다른 위치에 붙여놓았다. 그것만으로도 쉽게 문제 해결이 되리라고 믿었다. 그것은 안이한 생각이었다. A는 정확한 물증이 아니라며 막무가내로 억지 타령을 늘어놓았다. 친구와 나는 A의 모욕적인 말에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문제가 풀릴 것이라는 희망이 아침 햇살에 안개처럼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대로 그만둘 일은 아니었다. 골프채를 잃어버리는 것도 그러려니와 억울한 도둑 누명만은 확실하게 밝혀야 하지 않겠는가. 친구와 나는 골프채를 돌려받을 확실한 근거를 찾기 시작했다.

친구가 골프채를 일본 상인을 통해 샀기 때문에 어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수소문 끝에 판매처로부터 친구 골프채의 일련번호가 적힌 서류를 받았다. 우리는 도둑의 누명을 일분일초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A에게 그동안에 구입처에 확인했던 내용을 조목조목 말했다. 일본에서 보내온 제조사의 일련번호와 골프채의 번호를 대조한 결과 친구의 것이 틀림없었다.

A는 그제야 골프채를 건네주면서 서로의 착오로 일어난 일이라며 대충 얼버무렸다. 끝까지 제대로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능글맞은 그의 태도에 피가 또다시 끓어올랐다. '선생님'이라는 굴레에 순종하는 소가 될 것인가, 굴레를 벗어 버리고 괴물이 되어 응징할 것인가 갈등하였지만 순종하는 길을 선택하고 말았다. '선생님'이란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잠시 몸부림을 쳤을 뿐, 나는 결코 '대표'가 될 수 없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선생님의 굴레 속에 머무르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나다운 내가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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