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울진] 매화면 출신 동서기공 이태용 대표

입력 2017-09-29 00:05:00

성실함·밝음 무기 '만년 소년' "예순 넘어도 여전히 도전"

고향 울진을 생각하면
고향 울진을 생각하면 '배고픔과 따뜻함'이 떠오른다는 동서기공 이태용 대표는 "어느 것도 인생의 걸림돌이 될 수 없으며, 꿈을 잃으면 그때가 끝"이라고 말했다.

"실패, 많은 나이, 가난. 인생에 어느 것도 걸림돌은 없습니다. 꿈을 잃으면 그때 무너지는 거죠."

땔감을 지어 팔고, 쫄쫄 굶은 배를 시냇물로 채워도 그저 소년은 행복했다. 소년이 자란 마을은 나지막한 산들이 포근히 둘러싸고 늘 햇볕이 따뜻했다. 동무들과 어울려 땔감을 하러 산으로 올라갈 때면 햇볕을 이불 삼아 낮잠이 들곤 했다. 고향이 주는 그 따스함 속에서 소년은 언젠가 배불리 먹고 마시는 날을 꿈꿨을 터다. 어쩌면 멋들어진 학사모를 쓴 청년의 자신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가난한 시골마을 소년의 꿈은 50여 년이 넘어 모두 현실이 됐다. 그럼에도 희끗해진 머리를 누이고 소년은 여전히 꿈을 꾼다. 예순이 넘은 나이에도 꿈을 멈추지 않는 동서기공 이태용(62) 대표는 그래서 만년 소년이다.

"고향을 생각하면 '배고픔과 따뜻함' 두 가지가 떠올라요. 정말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지만 가장 그리운 시절이랍니다."

이태용 대표는 1956년 울진군 매화면 기양리에서 태어났다. 울진군청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그늘 속에서 풍족하지는 않아도 크게 부족함 없는 집이었다. 장남이었던 덕에 학교도 충분히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아버지의 퇴임 이후 가세가 급격히 기울었다. 학비는커녕 생활비가 부족해 이 대표는 저녁이면 땔감을 지어 팔고, 30여 리를 걸어 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래도 '사람은 배워야 한다'는 부모님의 열성으로 울진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공무원이 되기 위해 부산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말이 유학이지 유배나 다름없었어요. 도무지 집에 손을 벌릴 수가 없으니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해야 했죠. 제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연탄배달이든, 신문배달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먹고살기에도 빠듯한 나날이었다. 물론 공부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떠나기 전 키 174㎝에 60㎏ 중후반대였던 체격은 불과 1년 사이 50㎏대까지 급격히 말라갔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결심한 순간, 이 대표는 21세의 나이에 무작정 서울 길에 올랐다. "차비만 들고 서울행 기차를 탔죠. 그때는 서울에만 가면 어떻게든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처음에는 다리미 방문판매를 했었는데 크게 실패를 봤습니다."

얼굴이 새카맣고 삐쩍 마른 시골소년의 말을 들어주는 곳은 별로 없었다. 짐 배낭을 들고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구파발 산동네 쪽방을 벗어나기 어려웠다. 그래도 이 대표는 웃음을 잃지 않기로 결심했다. 혈혈단신의 타지에서 시골소년이 유일하게 가진 무기는 성실함과 밝은 성격 외에는 없을 것이란 생각에서다.

오류동 공장골목에서 선반공 일을 하던 이 대표는 그의 열정을 높이 산 한 지인의 소개로 삼립식품 생산직에 취업했다. 그곳에서도 성실함을 인정받아 농고 출신으로서는 이례적으로 공무과 사무직으로 발탁됐다.

어느 정도 기반을 찾자 잊어버린 꿈이 다시 떠올랐다. 1979년 산업체 근로자로 예비고사를 치러 대림공업전문대학 기계과에 입학했다. 졸업 이후 정들었던 공장을 뒤로하고 전공을 살려 1982년 삼화제작소에 입사했다. 지금 이 대표가 설립한 동서기공의 전신이 바로 여기서 마련됐다.

1994년 6월 30일. 이 대표는 사업 준비 13년 만에 동서기공을 창업했다. 주로 기계 설비에 쓰이는 '관내 고정식 연속혼합기' 제조업체이다. 효성, 두산중공업 등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으며 연평균 매출 40억원, 특허 5개를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중국'브라질'멕시코'인도'베트남'터키 등 해외 수출 길도 열려, 2015년에는 백만불 수출탑을 달성하기도 했다.

많은 걸 이뤄낸 이 대표지만, 60이 넘은 지금에도 그는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늦깎이 공부를 계속하며 올해 초에는 한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를 취득했다. 일과가 끝난 밤에는 여전히 공부를 계속하며 다음 발돋움을 준비 중이다.

"제 고향 울진을 흔히 '경북 최북단의 오지'라고 표현하죠. 교육이나 문화 수준이 열악하다고 불평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환경이 나쁘고 어려움이 겹겹이 쌓여도 그것이 성공을 막는 걸림돌은 아니에요. 꿈을 잊으면 그때가 끝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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