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은 영덕] 영해면 출신 보국전공 남병주 회장

입력 2017-09-29 00:05:00

임란 의병장 선조 뜻 받들어, 무애장학회 설립 16년째 운영 '애향'

고향 영덕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주)보국전공 남병주 회장은 무애장학회를 통해 고향에 대한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고향 영덕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른 (주)보국전공 남병주 회장은 무애장학회를 통해 고향에 대한 사랑을 묵묵히 실천하고 있다.

인터뷰를 고사하던 ㈜보국전공 남병주(65) 회장을 어렵사리 설득하고 몇 차례 약속 끝에 지난 9월 하순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오전 9시쯤이었지만 인터뷰 도중 휴대전화가 쉴 새 없이 울렸고 온화하면서도 자신감 넘치는 표정과 또렷한 음성에서 60대 중반이지만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영덕군 영해면 원구리 영양 남씨 집성촌 출신의 남 회장은 영해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외지에 나가 전기공사업과 건설업으로 자수성가했다. 전국 전기공사협회 회장과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내는 등 두드러진 사회활동도 했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개인적인 성공에 그치지 않고 고향의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을 16년째 이어오고 있다. 무애(남 회장의 아호)장학회를 통해 학생 559명에게 지금까지 5억6천여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그가 '회장님'으로 불리는 진짜 이유이다.

"제 어린 시절, 동년배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외지에 나가 공부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공부를 하지 못했던 것이 아픈 기억으로 내내 남네요. 나와 같은 어려움을 겪는 고향 후배 청소년들에게 꿈을 가질 수 있게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었습니다. 고향 발전을 위해서는 인재 양성이 최고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고향의 후배들과 상의해 지난 2001년 장학회를 설립하고 이듬해 봄부터 장학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꿈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남 회장. 수년 전부터 장학생들의 해외 배낭여행을 지원하는 것도 넓은 시야를 경험하고 꿈을 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처럼 후배들을 위한 장학사업이 어디 내놔도 손색없는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초창기 장학사업에 대한 오해를 받으면서 남 회장은 남모르는 속앓이를 했다.

"막상 장학회를 설립하고 나니 혹시 다른 의도(선거직 도전 등)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장학회 운영에 수십 명의 고향 후배들이 봉사해 주고 있죠. 아마 다른 뜻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장학회를 이어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장학금 수여식에는 외부 인사를 일절 초청하지 않습니다. 지면을 빌려 장학회 사업에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봉사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거듭 전하고 싶습니다."

남 회장은 자신의 인생에서 흔들릴 때마다 자신을 세우고 이끌어 준 것은 고향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이었다고 회상한다. 그의 13대조 할아버지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싸웠다. 또 고향 영해는 일제시대 한강 이남에서 가장 큰 규모로 일어선 3'18만세운동의 고장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때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방학 때면 한복에 망건을 쓰신 문중 할아버지께서 문중의 어린 아이들 수십 명을 불러 모아 천자문과 명심보감을 가르치셨죠. 방학 중 서당이 열린 셈입니다. 종아리 걷고 회초리도 맞아가며 예절도 배우고 사람과 삶을 대하는 자세도 그때 배웠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때 배운 좋은 귀절들이 입에 맴돕니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존감 같은 게 어렸을 적부터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남 회장의 고향에 대한 정은 갈수록 깊어간다. 그래서 바쁜 와중에도 요즈음 고향 찾는 발걸음이 더욱 가볍다. "나이가 들수록 타향에서 사업적으로 맺은 인연은 깊이나 색깔에 한계가 있는 것 같더군요. 그래서 고향 사람과 친구, 선후배들에 대해 더 애틋해지는 듯합니다. 선산도 있고 종택도 있고 해서 문중행사 때문에 올 때도 있고 친구들과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누러 올 때도 있지요. 간혹 어지러운 마음이 들 때 고향을 찾고 나면 정리가 되고 새로운 힘이 솟습니다."

영해평야는 동해안 일대에서 가장 넓은 곡창지대이다. 이 때문에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영해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계속 경북 북부권의 중심이었다. 소안동(小安東)으로 불릴 정도로 자부심이 남다른 고장이었다. 남 회장은 이런 영덕이 다시 한 번 비상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지난해 말 동서 4축 고속도로인 상주~영덕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올해 말이면 철도도 뚫립니다. 현재 남북 관계가 경색돼 있지만 이 문제만 해결되면 동해선 철도가 향후 러시아를 거쳐 유럽과도 연결됩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새로운 시대를 영덕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힘을 합쳐 준비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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