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 개척史 '검찰사의 길' 가다] <6>사동1리∼통구미

입력 2017-07-26 00:05:01

"바위가 많고 파도가 거칠어 백성이 경영하는데 고단함이 많겠구나"

24일 울릉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통구미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이 통구미 마을의 상징인 거북바위다. 사진 시점보다 더 왼편으로 가서 보면 거북을 꼭 닮았다. 오른쪽 바위절벽 주변이 향나무 자생지다. 하얀색 건물이 있는 곳부터 좁고 길다란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24일 울릉도를 찾은 관광객들이 통구미 해안을 둘러보고 있다. 왼쪽이 통구미 마을의 상징인 거북바위다. 사진 시점보다 더 왼편으로 가서 보면 거북을 꼭 닮았다. 오른쪽 바위절벽 주변이 향나무 자생지다. 하얀색 건물이 있는 곳부터 좁고 길다란 골짜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돼 있다.
이규원 검찰사가 사동에서 넘어와 통구미 해안으로 내려갔을 골짜기 모습이다. 길 양옆으로 가파른 산비탈에 부지갱이나물 밭이 펼쳐져 있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바위 쪽이 통구미 해안이다.
이규원 검찰사가 사동에서 넘어와 통구미 해안으로 내려갔을 골짜기 모습이다. 길 양옆으로 가파른 산비탈에 부지갱이나물 밭이 펼쳐져 있다. 사진 가운데 보이는 바위 쪽이 통구미 해안이다.

통구미골.

가는 비가 내렸다. 산봉우리에서 기어 내려온 구름이 해무와 뒤섞여 사방을 에워쌌다. 뼈와 근육이 눅진하여 밤새 잠을 설쳤다. 이른 아침 규원은 조용히 자갈밭을 밟았다. 인기척 없는 사방이 적막하였다. 다만 사람들이 베고 쪼고 다듬던 나무와, 서서히 골격을 갖춰가는 배의 형체가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갈밭에 남겨진 것들은 영달이 아닌 모조리 먹고사는 밥벌이의 기술뿐이었다.

절박함에 수천 리 물길을 건너온 사람들의 삶은 헐거웠으나 더불어 희망할 만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영원히 이 섬에 남아야 하고, 그들이 남음으로써 나라와 사람이 서로 복될 것이었다. 당대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날들 앞에 규원의 마음엔 조금씩 연민이 일었다. 국법이란 백성이 최소한의 먹고사는 것 후에 있을 것이었다. 죽을죄를 지었다고 엎드려 사죄하던 그들의 죄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규원은 국법에 의해 섬과 작별한 옛 사람들과, 섬을 잊지 못해 목숨을 다하여 대해(大海)를 건너온 악착같은 사람들을 생각했다. 조정은 비겁했다. 섬을 비우고 그 후 어떠한 긍정도 만들지 못했던 역사의 오류 앞에 규원은 어떠한 말로도 응답할 수 없어 실로 부끄러웠다.

종일 해는 뜨지 않았다. 긴 자갈밭을 지나 산으로 올랐다. 눅진해진 골짜기는 한기가 서려 있었다. 길은 없었고 발 딛는 곳마다 미끄럽고 살기가 돌았다. 산에는 구름이요, 바다에는 해무가 경계 없이 피어나 구분없이 뒤섞였다. 천지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바다인지 향방을 아는 이가 없었다.

구름과 해무는 뿌리 없이 일어나 서서히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엄습해 허옇게 시야를 낚아챘다. 길 없는 산을 오르내리며 결박된 사슬에 묶인 듯 모두가 위태로웠다. 지척의 산 중턱을 오르기 위해 깊은 골로 내려갔다가 다시 치고 오르기를 반복했다. 금방 보이던 사방 봉우리는 금세 사라졌다. 불가항력의 연속이었다. 축축하고 비릿한 숲의 냄새가 섬의 속살까지 치고 들어왔음을 짐작게 했다. 이끼며 고사리, 버섯 냄새가 물씬했다. 바람에 겹쳐진 구름이 두터워 나무들은 한 치 앞에서 헛것처럼 나타나곤 했다.

의복이 젖어 몸을 죄었다. 사지가 심히 불편하였다. 헉헉대는 사람의 냄새가 쉬고 후텁지근했다. 발바닥이 무르고 터졌다. 발톱이 깨지고 가뭇하게 죽었다. 발목이 붓고 다리에 쥐가 내려 뻣뻣하게 굳었다. 모두가 기진맥진했다. 잡초가 키만큼 자라 있고, 수목이 우거지고 낙엽이 쌓여 잘 나아가지 못했다. 바위 사이 절벽으로 희미한 길이 보였으나 수백 년 인적이 이르지 못한 듯하였다. 대숲 속에 이르렀는데 우레와 폭우가 쏟아져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었다. 눈앞에 지척이 천 리와도 같았다.

"나으리 아무래도 길을 잃은 듯하옵니다."

"식량을 풀어 최대한 멀리 흩뿌리도록 하라."

규원은 산신을 배불리 먹이고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간신히 숲을 잡고 덤불을 헤치고 몇 리를 더 나아갔다.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치니 이미 한낮인 듯했다. 봉우리와 산줄기가 드러났다.

겨우 방향을 가늠하여 가파른 계곡의 경사면을 따라 내려갔다. 모양새가 마치 통나무와 같이 좁은 계곡을 더듬어 내려가니 해안 기슭이었다. 남쪽을 향한 바다는 끝이 없고 암석은 층층으로 솟아 있었다. 바다로 조금 떨어져 우뚝 솟은 암석은 마치 거북이 한 마리가 뭍으로 기어 나오는 듯했고, 험악하고 가파른 암벽 틈에 향나무 수십 그루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포구는 작고 아담했으나 불안하였다. 날카로운 바위가 많고 파도가 거칠어 바다 백성이 들어와 노력하더라도 포구로서 용이하지 않을 것이었다. 개간하여 경영하는데 삶의 고단함이 몇 곱절일 것이었다. 가없이 밀려와 포구를 사정없이 때리는 파도는 넓고도 아득하였다. 바다의 움직임에 음산함이 서려 있었다.

박시윤 작가

◆긴 해변 따라 펼쳐진 너른 마을 사동

이규원 검찰사가 울릉도에서 6일째 밤을 보낸 사동은 울릉도 동남쪽에 자리 잡은 마을이다. 길고 오목하게 펼쳐진 길이 4㎞ 몽돌 해변을 따라 가장 동쪽부터 사동1리, 2리, 3리 마을이 넓게 이어진다.

"일제(강점기) 때 사동1리는 와록사, 2리는 옥천, 3리는 간령'중령'신리로 나눠 불렀어요. 울릉도엔 지금도 모래가 귀한데 와록사는 옥과 같은 모래가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요. 옥천은 구슬 같은 맑은 물이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요. 전체를 통틀어서 장흥마을이라 했지요."

사동3리 신리마을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곳에서 살고 있는 차원도(83) 씨가 말했다. 차씨 집안은 증조부 때 울산에서 이주해 정착했다.

'동아일보' 1934년 2월 8일 자 기사에 따르면 당시 울릉도 인구는 조선인 1만1천200여 명 일본인 480여 명으로, 1만여 명 수준인 지금의 인구를 훌쩍 넘어섰다. 일제강점기가 끝나갈 무렵 사동엔 240여 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가구당 6인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1천500명 수준이다. 행정 중심지였던 도동과 가장 가까운 사동1리가 120가구 정도로 제일 컸고, 사동2리가 50가구 정도로 가장 작았다.

일본인들은 주로 도동에 모여 살았지만 사동에도 있었다. 사동3리에만 10여 가구 정도 살았다고 한다. 일본인은 주로 해안가에 집을 짓고 바닷일을 해서 살았다. 조선인은 주로 산 쪽에서 화전을 일궈 농사를 지었다. 감자, 옥수수, 보리를 주식으로 삼았던 팍팍한 시절이었다.

"외딴 섬이라 없는 게 많았지요. 오징어 '누렁창'(내장)을 모아 깡통에 불을 피우고 짜면 기름이 나와요. 이걸로 집에 불을 밝혔는데 자고 일어나면 낯이 새까매요. 그렇게라도 불을 켜야 했어요. 소금도 귀했지요. 드럼통에 바닷물을 담아 불에 졸이면 소금이 생기는데 짜기가 말도 못해요. 그렇게 어렵게 살았어요. 박(정희) 대통령 되고 나서부터 사는 게 나아졌지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

'가난한 울릉도'에 살았던 이들은 대부분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품고 산다. 박 전 대통령은 50여 년 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울릉도를 방문했다.

1962년 10월 11일 강원도 고성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훈련을 참관한 뒤 군함을 타고 울릉도로 들어왔다. 군함을 접안할 항구가 없어 경비정으로 갈아타고 도동과 저동을 오가며 주민을 만났다. 당시는 해안일주도로가 만들어지기 전이어서 주민들은 어선을 타거나 산길로 마을을 오가던 시절이었다.

돌아가던 날 박 전 대통령은 경비정에서 군함으로 오르다 줄사다리에서 떨어질 뻔했다. 박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이래서 국가원수가 한 번도 울릉도를 방문한 적이 없구먼." 당시 동아일보 기자로 동행했던 이만섭 전 국회의장의 회고다.

국가 최고 통치권자의 방문은 가치가 컸다. 이듬해 운항 시간을 반나절이나 줄인 최초의 정기여객선 청룡호(350t)가 취항했다. 5년 뒤엔 저동항이 어업전진기지로 지정됐다. 그 밖에 항만'일주도로'수력발전소 건설 등 숙원사업이 속속 착수됐다. 방문 이듬해인 1963년 3월 의결된 '울릉도 종합개발계획' 덕분이었다. 울릉군 주민들이 박 전 대통령의 당시 방문이 울릉도 발전의 계기였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그러나 섬의 유일한 간선도로인 일주도로는 여태 미완성이다. 1976년 첫 삽을 뜬 이후 2001년까지 총연장 44.55㎞ 가운데 39.8㎞를 개설했다. 나머지 저동 내수전~북면 섬목 4.75㎞는 해안이 절벽으로 이뤄진 난공사 구간인데다 공사비 확보 문제로 미뤄지며 미개통 구간으로 남았다.

섬을 한 바퀴 돌아야 할 일주도로가 U자 모양으로 일부 구간이 연결되지 않다 보니, 하루 수백 대의 관광버스와 택시가 10여 분이면 갈 수 있는 섬목에서 내수전까지를 1시간여에 걸쳐 돌아 나왔다. 태풍과 호우 등 기상이 악화되면 수시로 고립되는 불편도 겪었다. 결국 경북도와 울릉군이 수차례 중앙부처를 방문해 지방도였던 일주도로를 국비 지원이 가능한 국가지원지방도로 승격시키며 미개통 구간 공사에 들어갔고, 2018년 말 개통을 목표로 현재 70% 정도의 공정률을 보이고 있다.

◆지질탐방 명소로 자리 잡은 통구미

135년 전 음력 5월 6일 오전. 울릉읍 사동1리를 출발해 서면 통구미로 향한 검찰사 일행은 4㎞가량 이어지는 몽돌해변을 따라 이동했을 것이다. 이 해변을 따라 지금은 일주도로가 나있다. 도로 왼쪽은 망망대해, 오른쪽은 가파른 산비탈로 온통 산나물 밭이다. 몽돌해변이 끝나는 서쪽 끝엔 사동항이 있다. 포항과 울진, 강원도 동해에서 출발한 배가 이곳으로 들어온다. 지금 항구 주변은 사동항 확장공사가 한창이다. 바다엔 자갈이나 모래를 실은 바지선 등 10여 척의 건설장비가 둥둥 떠다닌다.

사동 옛 지명인 '장작지'는 몽돌해변이 길게 이어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간 이어진 개발로 몽돌해변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요즘에야 자재를 육지에서 가져오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이곳 몽돌을 공사에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앞서 이 몽돌의 가치를 높이 평가했던 이가 있었다. 1982년 9월부터 2년 6개월간 울릉군수를 지낸 신승국 전 군수였다. "내가 이장할 때라 이름을 잊어버리지도 않아요. 신 군수 말이 '이런 돌 어디도 없다. 놔두면 돈 된다. 절대 손대지 말라'고 했어요. 참 아쉽죠. 그래도 개발은 해야 되니까 우짜겠어요." 차원도 씨의 말이다.

검찰사 일행은 사동3리쯤에서부터는 산길을 따랐을 것이다. 이곳에서 통구미까지 걸쳐 있는 산은 가파르고 험준한 골짜기를 이룬다. 지금이야 산길이 나있지만 당시 일행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선지 이규원은 이른 오후 통구미 바닷가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이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날 일기다. '겨우 내려와서 포 안에 흐르는 물가 암석 옆에 다다르자 다리 힘은 다 풀리고 배 속도 불편하여 다시 움직이지 못하겠기에 부득이 숙소를 정하였다.'

'울릉도 개척령' 이후 1883년 울릉도에 첫 이주민이 들어왔을 때 통구미엔 사람들이 정착하지 않았다. '농업 이주'의 성격이 강했던 만큼 좁고 가파른 산비탈로 이뤄진 통구미는 지형상 농지로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해안가 거북바위는 통구미 마을의 상징이다. 옆에서 보면 마을 쪽으로 기어가는 거북을 닮았다. 바위 여기저기 작은 거북 모습도 보인다.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육지에서 떨어져 나와 형성됐다고 한다. 이 일대는 지질 탐방 명소이자, 천연기념물인 향나무 자생지로 관광객이 꼭 거쳐 가는 곳이다. 거북바위 주변에선 용암이 흘러내린 흔적과 공 모양의 화산암 덩어리인 라바볼 등을 관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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