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대통령의 소통, 빛과 그림자

입력 2017-05-16 00:05:04

한국외국어대(스페인어 전공) 졸업. 전 한국스페인어문학회장. 전 외교부 중남미 전문가 자문위원. 현 한·칠레협회 이사
한국외국어대(스페인어 전공) 졸업. 전 한국스페인어문학회장. 전 외교부 중남미 전문가 자문위원. 현 한·칠레협회 이사

문재인 대통령 파격적인 소통 행보

반대 진영에서도 긍정적 평가 나와

남미 국가에선 40년 전부터 하던 일

소통 방식만큼 정책 실현도 성공을

내가 20대이던 시절,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다. 당시에 늘 그랬듯이 나도 직장 초년생으로서 동원되어 대통령이 지나가는 서울시청 앞 길가 환영 대열에 배치되었다. 저 멀리서 차량 행렬이 보이는가 싶더니 차 위로 불쑥 대통령이 얼굴을 내밀고는 만면에 웃음을 띠며 환영 군중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하였다. 이튿날에는 주한미군 기지를 방문하였는데 그 지엄하신 분이 일반 장병들과 같이 줄을 서서 배식을 받아 함께 식사하는 장면이 나왔다. 유신시대 말기로서 사회 전반에 걸쳐 억압적이고 암울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항상 근엄한 대통령의 얼굴과 고압적인 공무원의 자세만을 접하던 당시에 환한 표정으로 군중에게 다가오고 낮은 사람과 함께하는 이 '높은 분'의 모습은 4년 대학 생활을 반정부 투쟁 분위기 속에서 지낸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고 10'26과 5'18을 거치면서 이어지는 군부 정치 체제는 오히려 더 권위적이어서 '높은 분들에 대한 희망'은 아예 접을 정도였다. 대학원 졸업 후 교수가 되고 나서도 '그래도 쿠데타, 부정부패, 빈곤, 마약 등 부정적 이미지가 강한 중남미에 비해서는 우리가 훨씬 나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이런 마음으로 중미의 코스타리카에 첫발을 디뎠을 때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세상에 이름도 생소한 이 나라는 군대 자체가 아예 없을 뿐 아니라 대통령궁과 관저를 지키는 수비대의 모습은 한가롭기까지 했다.

이어지는 여정은 코스타리카의 40배나 되는 멕시코였다. 인구 1억 명이 넘는 중남미 대국답게 수도 멕시코시티의 중앙광장 규모 또한 컸다. 매해 9월 16일 독립기념일에는 이 광장에 면한 정부청사 발코니에 대통령이 나타나서 손수 종을 치며 멕시코 만세를 선창한다. 내가 찾은 날도 마침 독립기념일이라 광장은 인파와 행상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멕시코 전통 악대인 마리아치 음악으로 흥겨운 분위기가 가득하였다. 대통령이 발코니에 나타나자 대통령 이름을 연호하는 이들과 환호하는 이들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사방을 둘러봐도 삼엄한 경호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이래도 멕시코는 꾸준히 성장해 오늘날 중남미의 선진국이 되었다.

이 시기에 남미 페루에서는 알란 가르시아가 36세의 나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준수한 외모와 당당한 풍채로 페루의 케네디로 불렸던 가르시아 대통령은 웅변 솜씨도 뛰어나 1시간 30분 이상을 쉬지 않고 연설하며 군중을 휘어잡았다. 심할 때는 한 달에도 몇 차례 수도 한복판 정부청사 발코니에서 대중 연설을 함으로써 '발코니 연설'이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다. 그런데 이렇게 국민에게 다가서고, 국민과 함께한 소통 이벤트는 흥행에 성공하였으나 페루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집권 4년 차에는 인플레율이 무려 1천700%에 이르렀으니 페루 지폐는 그야말로 휴지 같았고, 좌익 테러 활동도 최고조에 달해 각종 공공시설이 파괴되고 무고한 양민이 집단 학살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르헨티나 역대 대통령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분홍빛 집'이라 일컫는 청사 발코니에서 국민과 직접 소통하곤 했으나 폐쇄적 대외 경제 정책으로 인해 한때 세계 4위의 부국이던 나라가 한참 낙후한 지경에 이르렀다.

요즈음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된 후 일주일간 보인 파격적인 소통 행보에 신선함과 함께 국민이 주인임을 실감하고 있고 반대 진영에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사실은 이것이 정상이고, 미국과 멕시코처럼 큰 나라나 코스타리카처럼 작은 나라나 이미 40년 전에 하던 일인데, 우리는 그동안 '낮은 국민'으로 대접받는데 익숙해져서 이런 유형의 소통이 새롭게 보이는 것이다. 정권 초기이고 불통의 대명사였던 전임 대통령과 비교되어 새 대통령이 갈채를 받고 있지만 이 초심이 임기 말까지 지속되어야 함은 물론 이 소통 방식만큼 정책 실현도 성공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행보는 남미처럼 신나는 공연은 했으나 엄청난 손실을 본 서커스 쇼처럼 여겨질 것이다. 대통령의 실천 여부에 따라 그 소통은 사회 전반에 걸쳐 빛이 될 수도 있고,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경제, 사회, 종교,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제대로 된 소통과 자율의 힘, '낮은 이'의 실천력이 발휘되는 분위기 조성 여부도 이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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