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정호승의 <술 한 잔>

입력 2017-04-29 00:05:01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 정호승의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겨울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 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 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인생은 나에게/ 술 한 잔 사주지 않았다(정호승, 전문)

"그랬지. 그때는 그랬어요. 어떻게 내 인생이 나한테 이럴 수가 있나 싶었지. 원망도 하고 그랬지. 근데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산산조각 난 내 인생은 깨지고 흩어져 버린 게 아니라 그 조각들이 모이고 모여 지금을 살 수 있게 한 힘이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정호승의 어느 사석 인터뷰에서)

바람이 심하다. 구름이 나에게서 달아난다. 하늘에서 늦게 핀 하얀 벚꽃이 바람에 날린다. 사실 사소한 일이다. 그런데도 지켜보고 있으면 묘하다. 달아나고 날리는 모양이 모두 다르다. 달아나고 날린 그곳에는 또 다른 구름과 벚꽃이 모여든다. 그것이다. 내가 가슴을 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고 살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나에게 주어지는 삶의 의미를 영원히 모르고 살았을 뻔했다. 우리에게 삶이 던지는 의미는 항상 우리를 힘들게 한다. 하지만 그 의미의 무거움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래서 삶은 의미로 이루어진 동그라미인지도 모른다. 멀어지는 만큼 다시 가까워지는 동그라미, 하지만 결국 중심에 다가가지 못하는 동그라미. 그 반지름을 사랑해야 함에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모호하지만 그랬다. 너로 인해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하지만 어둠에서 불빛으로 넘어가는 그 찰나에 너의 얼굴은 꺼졌다, 사라졌다. 마음은 허물어지고, 심장은 이미 내 심장이 아니다. 불안하다. 김수영의 시처럼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이 나를 때린다. 모호하지만 분명 사랑은 그랬다.

떠나는 꽃잎과 머무는 꽃잎 사이에 시간이 잠깐 머문다. 마구 깊어진 봄 햇살이 따스하다. 만약 이 짧은 시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어떠한 나도 아무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사랑하고 있는 나도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사랑하고 있는 것에 의해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얼굴은 그만큼 불안하다.

삶은 언제나 나를 배신하고 저만큼에서 나를 돌아선다. 산산조각이다. 그것이 서운해서 몇 번이고 나는 삶에게 술을 사 주었으나 삶은 나에게 술 한 잔 사 주지 않았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는 내 삶의 풍경이다. 그런데 신기하지 않나? 나는 분명 거기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술 한 잔 사 주지 않는 내 삶에게 언제나 나는 술을 대접받고 있지 않나? 그랬다. 나를 배신하고 돌아선 바로 그 삶이라는 놈들이 모여 지금을 살아가는 내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 배신한 삶들도 나에겐 진정 고맙다는 것. 갑자기 마시고 싶네. 소주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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