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새들의 저녁 <5>-엄창석

입력 2017-03-28 07:51:11

계승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아연히 앞을 바라보았다. 어제는 왜 성벽만 보였을까. 성벽은 오히려 멀리 떨어졌고 그 앞으로 일식 건물들이 오래 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다는 듯 옅은 안개에 감싸여 있었다. 철도 너머 낮은 지대로 펼쳐진 풀밭만 그대로였다. 모든 게 이전과 달랐다. 7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풀밭 저 너머에 자주 범람하던 신천이 흐르고 있을지, 이 길을 따라가면 큰시장이 나올지 의심스러웠다.

숙소에서 아침을 먹고 모두가 하행선 광무호를 타러갈 때 계승은 일행에서 슬며시 빠져나왔다. 일인 노무자 몇도 이탈하는 눈치였다. 우치타가 보이지 않아 찜찜했지만, 대구에 남겠다는 생각을 고쳐먹지 않았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마종수도 같이 대구에 남으려고 했다. 이른 아침에 철거 일을 마치고 대구정거장 옆 숙소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을 때였다. 마종수의 바지 앞섶이 누랬다. 마종수는 아미산 기슭에서 만났던 계집애에게 욕을 퍼부었다. "궁둥이 끄덕거리는 게이샤가 더 해. 다시 오라는 거야 뭐야?" 계승은 낄낄 웃었다. "와서 바다를 메우라는 거네." 마종수는 아미산 남쪽 해변에 있는 매독병원으로 갈 도리밖에 없는 것이다.

일식 건물은 철도와 평행선을 이루며 줄곧 이어졌다. 각이 진 지붕과 곧은 처마를 가진 요릿집. 장방형 유리창 사이로 장마루가 깔린 고급 여관. 면포, 화로, 목도리, 장갑, 신발을 내놓은 상점들이 있었다. 한자 상호를 처마에서 늘어뜨린 가게도 보였다. 훤칠한 일식 건물 사이에 초가를 개조해 서양물품 취급점이라고 쓴 작은 가게도 군데군데 끼어서, 골목이 갑작스럽게 좁아지거나 트였다.

주인이 진열대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점포 앞을 빠져나올 때 얼핏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계승은 뒤를 돌아보았다. 옹기장수 지게꾼과 일인 몇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지만 유별히 눈에 띄는 이는 없었다. 일식 건물이 걷히고 따개비처럼 엎드린 낮은 초가를 지났다. 초가 뒤로, 믿을 수 없을 만큼 흐무러진 성벽이 나타났다. 지난밤에 헐었던 곳이었다. 양편으로 성벽이 무너진 북문은 하릴없이 크게 열려있고 성 위의 누각은 더 높이 솟아, 위태롭게 보였다. 북문 우측으로 나뒹구는 돌 위에 독수리가 한 마리씩 앉아 있나 싶었다. 까맣게 더럽혀진 옷을 입은 아이들이 돌을 하나씩 차지한 채 옹크리고 앉아 늦가을 햇살을 쬐었다.

북문을 지나면서 일식 건물이 연해 나타났다. 7년 전에는 초가만 듬성듬성 있던 자리였다. 성 밖 가운데 이곳이 가장 외졌다. 지금 정거장이 들어선 칠성동과 큰시장 뒤 후동(後洞) 사이인 이곳은 예전부터 황량했다. 철도가 놓이기 전이니까. 그 무렵엔 일인 몇 사람만 대구에 왔을 뿐이었다. 철도가 놓인 건 계승이 떠나고 3년이 지나서였다. 계승은, 철도공사를 따라 수많은 인부들과 청부회사 관리들과 전신(電信) 선을 지키는 군대가 대구로 몰려들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선지, 계승은 길을 걸으면서 기시감이 자꾸 들었다. 이곳이 황량했던 게 아니라 바라크 지붕과 일본 특유의 목재판벽 건물들이 7년 전에도 있지 않았을까. 벽돌로 지은 응축한 성 같은 관청까지도. 청도의 성현터널 공사장에서 나와 밀양과 언양과 양산으로 떠돌면서 이런 대구의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 속에서 들판에 건물이 쑥쑥 들어서고 짧은 머리카락의 사람들이 착 달라붙는 옷을 입고 돌아다니고, 왜어가 흘러 다녔다. 아마 그럴 거야. 기차가 어디로 지나가는지 모르지만. 기차가 지나는 곳을 알게 되면 상상이 쉬울 텐데, 오히려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설마 성을 부수며 도시 중심을 통과했을까.

어릴 때의 기억은 흩어지고 상상으로 자란 풍경이 그 자리를 메웠다. 마치 익숙한 거리를 걷듯이. 초량에서 보던 일식 건물들이 원래부터 이 도시에도 있었던 것처럼.

계승은 가방에 손을 넣어 손거울을 만졌다. 초량왜관 입구에서 살 때 가슴이 설레었다. 손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비치는 것이 자신이 아니라 그녀이길 바랐다. 애란.

도시는 상상 속에서 자랐지만 애란은 자라지 않았다. 애란은 그대로 열한 살이었다. 7년이 지났으니까 열여덟이지 않나. 약간 주저앉은 듯한 콧등, 아주 새카만 눈동자, 덧니가 조금 나온 치아와 흰 팔목에 일곱 해가 어떻게 끼쳐졌는지 알 수 없었다. 언제부턴지 그녀의 얼굴을 잊었다. 열한 살인 채로 흐릿해졌다. 콧등도 눈동자도 짐작할 수 없었다.

계승이 부산으로 내려갔을 때였다. 초량에는 서양 여행자들도 적잖게 눈에 띄었다. 환쟁이들이 즉석에서 그려주는 그림이 서양인들에게 인기였다. 화선지에 붓으로 그리거나 종이에 연필로 그리기도 했다. 피부가 두부처럼 흰 펠트 모자를 쓴 서양 여자가 제일은행을 배경으로 서서 환쟁이를 보고 방긋 웃었다. 계승은 종이 위에 희미하게 윤곽이 잡히는 서양 처녀의 눈과 입술과 뺨을 보다가 애란이 떠올랐다. 아 애란이 저렇게 생겼지. 그러나 흑연 심으로 겹겹이 칠하는 종이 위의 얼굴에서 애란의 모습은 지워지고, 처음부터 그녀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는 것이 돼버렸다.

애란의 집은 그대로 있을까. 한번도 하지 않았던 의심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집은 큰시장 뒤에 있었다. 일인이 하는 상점들은 북문에서 망경루까지 이어졌다. 망경루는 아직 무너지지 않는 상태였다. 계승이 망경루를 돌아 남쪽 큰시장 길로 접어 들 때였다. 흠칫, 하며 뒤돌아보았다. 왜 그런지 우치타가 따라온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침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키가 아주 작았을 뿐 우치타는 아니었다. 곱사등이 하나가 골목으로 쓰윽 몸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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