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10조원 해프닝

입력 2016-12-26 04:55:02

1975년 4월 25일 응웬 반 티우(1923~ 2001) 전 베트남 대통령은 미 군용기에 몸을 싣고, 망명지인 대만으로 향했다. 북베트남군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기 5일 전이다. 독재자들이 달아날 때면 금괴나 귀중품 등을 챙겨 달아나는 것이 전형인데, 그는 어땠을까.

당시 보도에는 티우가 금괴 2t 혹은 3.5t, 심지어 16t, 21t을 갖고 달아난 것으로 돼 있다. 스위스 비밀은행 계좌까지 있다고 했다. 티우를 수행한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은 그의 트렁크를 옮길 때마다 '금덩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고도 증언했다.

티우는 대만을 거쳐 미국 보스턴에 정착해 작은 집에서 단출하게 생활했다. 보수 싱크탱크인 헤리티지 재단의 신세를 지며 풍족함과는 거리가 멀게 살다 죽었다. 이렇게 된 데는 실제 금괴를 본 이는 아무도 없고, 대부분 추측성 기사이거나 북베트남 정부의 거짓 발표를 그대로 믿은 탓이다. 당시 베트남 중앙은행에는 16t의 금괴가 보관돼 있었고, 미국 정부는 뉴욕 연방준비은행에 예탁할 것을 요구했다. 마지막 경제 장관이던 중국계 응웬 반 하오가 끝까지 반대해 결국 북베트남의 차지가 됐다. 티우는 독재자, 나라를 망친 자였을 망정, 10조원(현재 가치)이 넘는 자산을 챙겨 달아난 이란의 팔레비 왕이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전 대통령과는 좀 달랐던 모양이다.

며칠 전 최순실 모녀가 유럽 4개국에 10조원의 비밀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는 한 일간지 보도에 큰 소동이 일었다. 정치인들은 당장 최 씨 모녀의 재산을 환수해야 한다며 거품을 물었고, 일부 언론은 최 씨 모녀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14조원에 이어 국내 두 번째 부자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10조원은 박정희 일가 차명재산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상식적으로 최 씨 모녀의 10조원은 턱도 없는 얘기다. 현재의 세계 금융 시스템이나 정보 접근 수준을 보면 그런 천문학적인 금액은 숨길 수도 없고, 비밀리에 운용하기도 어렵다.

소설 같은 기사에 대권후보와 야당 대표 등을 비롯해 모두가 흥분해 떠드는 걸 보면 어이가 없다. 단 한 번이라도 확인하거나 검토할 생각도 없이 입에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결국, 독일 검찰이 최 씨의 돈세탁 규모가 30억~40억원 규모라고 밝히면서 해프닝이 끝났다. 완전히 나라 망신이다. 이런 유언비어와 궤변에 놀아나는 것을 보면 한국은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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