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리의 핏빛 목소리<10>-제2회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 최우수상

입력 2016-11-08 04:55:01

삽화 이태형 화가
삽화 이태형 화가

집 봐주러 갔다가

아버지는 고모 집을 봐주러 박사리에 갔다가 변을 당했어. 놈들이 불이 켜진 집을 습격할 때 붙잡혔어. 아버지가 흉기에 맞아 돌아가신 곳은 정미소 마당이야. 교회에 옮겨 놓은 아버지의 시신을 큰아버지가 모시고 왔어. 장례를 어떻게 치렀는지, 더는 생각 안 나. 어린 아들에게 아버지의 험한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한 것 같애. 고모는 자기 때문에 남동생이 죽었다며 땅을 치며 울었다더군. 남동생을 잃은 고모의 슬픔도 컸겠지만, 어찌 어머니에 비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힘이 장사였는데….

"그 뒤, 생각에 남는 것은 없는지요?"

"우리 집 뒷산에 22연대 장병들이 진지를 만들었어. 박사리를 향해 망을 본 거야. 6'25 때까지 계속 주둔했어. 어릴 적 숨바꼭질하고 놀았어."

22연대가 주둔했던 숲골 뒷산을 올랐다. 야트막한 산이지만, 박사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 막사를 설치한 자리는 움푹 팬 채 펑퍼짐하게 닦아놓았다. 참호는 67년 기나긴 비바람에 거의 흔적을 감추었다. 이 초소에서 마을 청년들이 조를 짜 보초를 섰다.

더 자세한 증언을 듣고자 딸 윤분연을 만났다.

"집에서 놀고 있으니, 박사리 하늘에 불꽃이 치솟았어. 엄마는 집을 봐주러 가신 아버지가 걱정됐는지 안절부절못했어."

"'너그 아부지 왜 아직 안 돌아오노?' 하고 걱정하며 박사리에 건너갔어. 이미 박사리는 쑥대밭이 되었어. 고종사촌 동생이 숨었다 나오면서 외삼촌은 죽었다고 하더래. 동사에 옮겨 놓은 시신을 그 이튿날 옮겨 정싯골 못 안에 장례를 치렀어. 경황이 없어 봉분을 제대로 다듬지 못했지. 어머니는 아버지의 산소를 자주 찾았어."

산소에 다녀온 어머니는 "야시가 무덤을 마구 파헤쳐 놨다"며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더라고. 윤금출은 박사 사건에 희생된 외부인 3명 중, 한 사람이다.

#23. 사망자 윤금출 44세. 장남 윤대해 6세. 와촌면 대동리

장녀 윤분연 10세. 대구 동구

처절했던 어머니의 삶

깊은 잠에 빠져 있었어. 잠을 깨우는 할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깨어나니 벌써 우리 집은 불타고 있었지. 정신없이 뛰쳐나왔어. 논 마당에 짚단을 깔고 이불을 덮어쓴 채 몸을 피했어. 무서워서 떨고 추워서 떨었어. 어머니는 맹렬하게 타는 불길 속에서 헤매며 가재도구를 챙겼지만, 건져낸 것은 고작 몇몇 옷가지와 식량 몇 됫박이 전부였어. 할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였지만, 위채'아래채'헛간채가 화마에 휩싸였기에 이웃집에 모셨어.

마을 전체가 피바다가 되었으니 장례도 제대로 치를 수 없었어. 해진 가마니와 멍석 자체가 관이었지. 절차나 의례를 차릴 겨를이 없이 묻기 바빴어. 나는 아랫마을 덕촌리, 외당숙댁에 피신한 터라 아버지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장례가 치러졌어. 맏이로서 상주 노릇 제대로 못 한 것이 아직도 한이 돼. 진외가'외가의 도움으로 겨우 장례를 마쳤어.

"그날 이후로 사실상 가장 노릇을 했겠군요?"

"헤쳐 나온 삶은 형언할 수 없어. 단칸방에 조부모와 어머니, 동생 둘, 여섯 명이 생활했지. 시부모와 한방에 거처하신 어머니가 얼마나 불편했겠어. 거처할 공간이 없어 일 년 동안 동사에서 살았지. 할아버지는 새로운 집터를 정했지만, 마을에서 멀리 떨어졌다는 이유로 할머니가 한사코 반대했어. 하도 세상이 어지럽고 위험했으니까. 남의 땅과 흥정하여 마을 복판에 집터를 마련했어. 집을 짓고 난 다음, 어린 동생들과 함께 돌을 나르고 흙을 짓이겨 담을 쌓았지. 담을 완성했을 때, 우리 가족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어."

"어머니 고생이 컸겠군요?"

"스물여덟에 지아비를 잃은 어머니의 가장 노릇은 피눈물이 났을 거야. 위로 늙은 시부모, 아래로 어린 세 아이를 양육하려니 앞이 캄캄하지 않았겠나? 하루에도 몇 차례 세상을 하직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지만, 새끼들이 눈에 밟혀 질긴 목숨 버리지 못했다더군. 남정네도 버거운 농사일부터 땔감 장만까지. 어머니는 이를 악물고 모든 것을 종교에 의지했어. 철 따라 삼베'양잠'무명베 길쌈하여 생활을 꾸려나갔지. 큰 자식 하나라도 공부를 시키겠다며 할아버지와 다투는 것을 여러 번 봤어. 나는 언제부터인가 가장이 되기로 결심했지. 맏이인 나 대신, 남동생을 상업학교에 보냈어. 어머니는 불을 끄면서 마신 연기로 인해 기관지가 약해졌고, 아버지를 잃은 것이 한이 되어 화병'심장병'간경화로 가녀린 몸이 허물어져 내렸지. 어머니는 평생, 병마와 씨름하다 세상을 하직했어. 국문을 깨친 어머니는 사돈 간에 주고받는 편지를 도맡아 써 주곤 했지. 호강 한 번 제대로 시켜 드리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

"나라에서 보상이 없었는지요?"

"구호품 정도가 전부였어. 훗날 대구에 사는 친척에게 들은 얘기야. 우리 마을 이야기가 온 나라에 알려져 모금운동을 벌인 것으로 알고 있어. 옷가지나 구호품은 받았지만, 위로금을 받은 사실은 전혀 없어. 사건이 일어나고 칠 개월 만에 6'25가 터졌지. 혼돈의 시대였다지만, 예나 지금이나 악덕 관리들은 기생충처럼 발붙이고 있었던 모양이야. 지금까지 국가에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오늘에 이르니 돌아가신 분들에게 죄스러워. 안타까울 따름이야."

윤성해는 현재 유족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자유총연맹에서 주관하는 추모제에 몸소 제수를 준비한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령들의 보상책 마련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공비들이 주둔한 팔공산 양시 골짜기에 상징물을 건립하여 반공희생자위령비 추모공원과 더불어 '애국의 현장'을 만들고자 힘을 기울이고 있다.

#24. 사망자 윤봉근 32세. 장남 윤성해 8세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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