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영원한 적, 영원한 동지

입력 2016-11-03 04:54:59

흔히 사용하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말은 원래 외교가에서 나온 말이다.

로마제국의 몰락 이후 유럽은 1천여 년간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렸다. 그 하나인 '독일 30년 전쟁'을 계기로 평화를 갈구하던 유럽인들은 1648년 이른바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했다. 독일이란 이름이 붙긴 했지만 이 전쟁은 독일을 주 무대로 덴마크와 네덜란드, 에스파냐, 프랑스, 스웨덴 등 여러 나라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국제 전쟁이었다. 그 결과 에스파냐는 서유럽에서 밀려났다. 반면 프랑스의 영향력은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고,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긴 명분이나 관행보다 국익을 앞세우는 풍조가 바탕이 됐다.

이를 간파한 이가 영국의 정치가 파머스턴 경이었다. 그는 조약에 나타난 원칙을 짚어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다만 (국가의) 이익만이 영원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요즘 우리나라에선 이 명언 앞에 '정치판'이라는 말이 붙어 회자한다. 정치판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식이다.

리더십 상실 위기에 놓인 박근혜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 시절 정책실장을 지낸 김병준 국민대 교수를 신임 국무총리에 내정했다. 두 사람은 과거 적이었다. 인연이라기보다는 악연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관계다. 참여정부 시절 행정 수도 이전을 두고 두 사람은 대척점에 섰다. 김 내정자는 당시 행정 수도 이전에 역점을 뒀고 이를 극렬하게 반대한 것이 박근혜 당시 대표를 앞세운 한나라당이었다. 2006년 8월 김 내정자가 교육부총리에 임명되었을 때도 한나라당은 논문 표절 의혹을 끈질기게 제기, 결국 낙마시켰다.

반면 김 내정자는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와는 참여정부 아래서 한솥밥을 먹은 동지였다. 문 전 대표가 시민사회수석과 민정수석을 지낼 때 김 내정자는 대통령 정책실장으로 한 우산을 썼다. 참여정부가 끝난 후 두 사람은 2009년 범친노계 모임인 '시민주권' 운영위원회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리며 호흡을 이어갔다.

박 대통령이 김 내정자를 구원투수로 내세우자 문 전 대표는 대통령이 하야하라는 민심에 공감한다며 김 내정자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더니 어제의 동지는 오늘의 적으로 돌아섰다. 결과가 어떨지 사뭇 궁금하다. 그래도 파머스턴 경의 말 가운데 하나가 남는다. 국익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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