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배 속에서 울었다
조심스럽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사건이 터졌을 때 어머니 배 속에 있었다. 소위 유복자다. 그녀의 살아온 여정을 묻는다는 자체가 마음 아팠다.
"엄마 배 속에 웅크리고 있었으니 무엇을 알겠어요? 그저 들은 이야깁니다. 그날 아버지는 집에 계셨대요. 주위가 스산하여 아버지께서 밖에 나가지 못하도록 엄마가 말렸대요. '형님이 논 마당에 끌려간 것을 알면서 어찌 집에 있겠노?' 아버지는 큰아버지를 찾으러 나갔다가 놈들에게 붙들렸어요. 여느 사람처럼 논에서 칼에 맞아 돌아가셨어요. 엄마 말씀만 들었더라면…."
"그 후의 삶은 어땠나요?"
"갓난아기인 나는 능성동 외할머니가 키웠어요."
"어머니의 충격이 무척 컸겠군요?"
"어떻게 말로써 형용하겠어요. 나를 낳고 친정과 시집을 오갔지요. 돈벌이에 나선 엄마가 지친 몸을 끌고 나에게 젖을 물릴 때, 피눈물을 흘렸겠지요. 젊은 나이에 남편 잃은 어머니는 나를 의지하고 평생을 수절하겠다고 말했대요. 그럴 적마다 외할매는 엄마의 고집을 꺾고자 무척 힘들었대요. 비록 재혼하였지만, 자주 친정에 들러 나를 보살폈어요. 열 살쯤 나이 많은 외삼촌이 오빠처럼 잘 대해줬어요. 여덟 살에 초등학교에 들어갔지요. 학교선생님이 마을마다 다니며 이름을 적어 바로 입학하던 시절이었지요. 외가에서 공부하고, 외가에서 결혼했어요. 시집가서 삼 남매를 낳아 길렀지요. 남편은 내가 마흔네 살 때 저세상으로 떠났어요." 한숨 소리가 명주실처럼 길고도 질기게 다가왔다.
전화 접촉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직접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근무하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서는 여러 명이 일을 하고 있었다. '저 여인이 배유순이구나.' 단번에 알아차렸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의 손을 잡았다. 첫 만남이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같은 해,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지 않았는가? 알 수 없는 교감이 67년이란 긴 세월의 장벽을 허물었다. 그녀는 원숙미를 풍겼다. '여인의 나이 스물까지의 얼굴은 부모님이 물려준 선물이라면, 그 뒤의 얼굴은 안으로 살피고 닦은 소양이 밖으로 풍긴다'고 했다. 일찍 배 속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사십 대 초반에 남편을 보냈다. 세 자녀를 키워온 삶이 만만하지 않았을 터인데…. 파전 한 장과 막걸리를 들이켜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오래된 지기처럼 편안하다. 묻어놓은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다. "자주 연락하자"는 말을 던지고 문을 나설 때, 맛나는 시루떡 봉지를 나의 손에 쥐여 준다. 마음 씀씀이가 따사롭다.
#19. 사망자 배치규 31세. 딸 배유순 태아 9개월. 대구시 수성구
어머니를 잡으려 했지만
단지 터지는 소리, 닭 우는 소리가 요란하더군.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동생(배석기)은 엄마 등에 업혀 큰 골목으로 나왔어. 벌써 마을은 불바다가 됐어. 우리 집에서 나오면 바로 논이지. 어린 눈에 봐도 벌써 열댓 명이 죽어 있었어. 공비들은 사이사이 죽창을 들고 보초를 서 있었고. 그들은 쥐꼬리만 한 양심은 있었는지 박춘발 어른은 돌려보내더라고. 머리가 하야니까 연세가 들어 보였을 것 같애. 육십 세 이상은 죽이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나머지는 다 죽였어. 수습하지 못한 일부 시신은 교회로 옮기더군. 한참 시간이 흘렀어. 주검들 위에 태극기를 덮어 놓았더군.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요?"
"큰아버지 아래 살았지. 열여섯에 고모부가 운영하는 영천의 목공소에 취직했어. 동생은 친척뻘인 양춘당 약방에서 일을 거들었고. 일흔이 훌쩍 넘은 지금도 끌과 대패는 나의 손을 떠날 날이 없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머니는요?"
"어머니는 몸이 아프다며 외가에 자주 오갔어. 그때 새 아버지가 생겼을 것 같애. 내가 여덟 살 되던 가을날, 논에 참새 쫓으라며 나를 들판에 보내놓고는 엄마가 사라졌어. 엄마를 잡겠다며 무작정 하양 쪽으로 내달렸지. 흘러내리는 바지를 손으로 움켜잡고 달려 보았지만, 어머니를 잡지 못했어."
"그 후 어머니를 만난 적 있는지요?"
"엄마가 보고 싶어 김천시 능소면에 있는 외가에 찾아갔어. 엄마의 행적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어머니는 충북 영동에 시집갔더라고. 외할배가 몇 차례 엄마에게 편지했지만, 답장이 없었어. 어느 날, 논을 매고 있으려니 의붓아버지가 찾아왔어. '네가 홍기냐?' 의붓아버지의 물음에 이상한 마음이 들더라고. 뒤이어 어머니가 왔어. 그렇게도 사무치던 엄마를 십 년 만에 만났지만, 별 감정이 없었어. 그냥 무덤덤하더라고. 김천역에서 어머니와 이별했지. 어머니는 북쪽으로 가고 나는 남쪽으로 돌아섰지. 막상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짠했어.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이란 노랫말이 생각나네. 어머니는 아직 살아계셔. 아흔이 넘었어."
#20. 사망자 배해술 35세. 아들 배홍기 7세. 경북 영천
남편은 공비에게 잃고, 자식은 홍역에 잃었다
태어나기 오 년 전 일이라 아버지와 할머니께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돌아가신 큰아버지는 결혼한 지 이 년 되었지요. 큰아버지도 사랑방에 놀러 갔다 정미소 마당에서 참변을 당했어요. 사건 당시 돌 지난 아이가 있었습니다. 큰어머니는 아이를 데리고 영천시 화산면에 있는 친정 곳에서 살았어요. 아기마저 홍역으로 죽었어요. 아기가 살아 있을 때는 발걸음을 자주 했지만, 아기를 잃고 난 뒤에는 걸음을 끊었어요. 물론 재혼을 했지요. 재혼한 큰어머니는 혼인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살았나 봐요. 2000년경에 호적을 정리했어요.
신봉환은 이명박정부 시절, '국민권익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할 때 유족회장과 더불어 노력을 기울였다. 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관련 서류를 보냈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21. 사망자 신상주 23세. 조카 신봉환
딸마저 정신을 놓다
"돌아가신 분은 저의 칠촌 아잽니다. 정미소 마당에서 죽임을 당했지요. 재종 할아버지는 사건 당시 만주에 있었습니다. 신영문 아재는 홀어머님 밑에서 자랐어요. 장가를 들어 슬하에 딸 하나가 있었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못했어요. 사건 때 받은 충격일 것 같다고 전해 들었습니다. 딸은 돌림병에 걸려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대요. 아재의 여동생이 가끔 친정에 올 때면 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갔지요. 저와는 팔촌 사이지만, 가장 가까운 친척이었으니까요. 아재를 대동리 묘골 선산에 묻었어요. 벌초할 후손이 없어 내가 벌초를 했습니다. 아재의 생질녀가 개장 후, 화장했어요."
#22. 사망자 신영문 33세. 조카 신봉환. 박사리
◇박기옥
1949년 경산 와촌 출생. 모리코트상사 대표. 현 경산문인협회 회장. 수필집 '고쳐 지은 제비집' '소금 세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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