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정부는 없다/전원책 지음/포엠포엠 펴냄
텔레비전과 신문을 자주 보는 사람들은 변호사 전원책을 뛰어난 논객으로만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원책은 논객 이전에 시인이다. 22세 때인 1977년 당시 젊은이들이 선망하던 '한국문학' 100만원 고료 신인상에 당선됐다. 10년 뒤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또 당선됐다.
전원책의 시 작품에는 '뼈'가 있다. 살점과 피부로 겉을 부드럽게 드러내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뼈'가 있다. 이 말은 시적 정서에 굳은 심지가 있다는 의미인 동시에, 문체 또한 단단하다는 뜻이다.
「마릴린 먼로는 죽었다. 어느 봄날, 천사의 붉은 입술을 가졌던 그녀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다. 미친 각선(脚線)을 다시 볼 수 없다.
나는 그녀와 잔 적이 없다. 처음 길 위에서 만났을 때 그녀는 너무 어렸고, 두 번째 길 위에서 만났을 때 함께 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더러운 기억들을 언제나 눈물인 양 뿌려댔지만 연기(演技)였다. 나는 그녀와 함께 잔 정치인과 상인을 미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릴린을 샀을 뿐이다.
칠 년 만의 외출이 끝나고, 돌아와
상심(傷心)한 저녁에 그녀는 수면제를 먹었고 나는 그녀의 벗은 몸이 잘 보이는 강가에서 소주를 먹었다. 그녀는 먼저 잠들어 흘러가고 나는 그녀를 수도 없이 지나쳐 빈 소주병 남은 기억들을 마저 비운 뒤에야 할 수 없이 잠든다.
비가 온다. 느닷없는 비에 사람들은 종종걸음을 친다.」 -상심한 저녁- 전문
이루지 못한 사랑과 펼치지 못한 꿈을 간직한 채 살아가는 존재가 사람이다. 드물지만 사랑과 꿈을 완성한 사람도 있다. 전원책은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이 시를 쓰지는 않았다. 사랑과 꿈을 모두 차지한 사람이 무엇이 아쉬워 시를 쓰고, 어떤 저녁이 서러워 시를 읽을 것인가. 그러니 전원책의 이 시는 사랑도 꿈도 가지지 못한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을 향한 헌사다.
정치권에 몸담고 있거나 정치권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의 행태를 비판하는 작품들도 많이 있다.
「세상 어디에도 개들은 있다. 개들은, 땅의 미세한 떨림이나 세상의 온갖 향기에 묻어 가늘게 이어지는 한 가닥 낯선 냄새의 실체가 적(敵)이라는 것을 알 때 짖지 않는다. (중략) 가끔 개와 마셨다. 내 발을 핥는 개에게 한잔, 나도 한잔, 잔이 돌면 손을 핥고 이마를 핥고 이제 아무 때나 꼬리를 흔들어도 좋았다. 마침내 술판이 어지러워지면 내 다리에 오줌을 싸서 영역을 표시했다. 내가 개가 아니란 걸 느꼈을 때 개는 내 다리를 물어뜯고 손을 할퀴고 으르렁댔다. 한때, 나는 개의 가랑이 밑을 기었다. 그런 개들은, 서울 어디에도 있다. (중략) 개들도 가르마를 타고 안경을 쓰고 거만한 모자를 쓰기도 한다. 그래봤자 개다! (하략)」 -낮술2- 중에서
이근배 시인은 "전원책의 시는 언제나 시대의 심장을 겨누고 있는 날 선 칼끝이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문단 권력에 영합하지 않는 독보적이면서도 번뜩이는 감성언어를 채집한다. 혹여 그가 변호사라는 직업과 요즘 승승장구하는 '썰전'의 패널로 정치시사 평론가의 몫을 잘하고 있는 것에 무게를 둘지 모르나 그는 시인 사회에서도 당당하고 시를 잘 쓰는 시인이다. 그의 시는 외도가 아니고 정도다"고 말한다.
이번 시집은 3Part로 구성돼 있다. Part 1은 '나에게 정부는 없다', Part 2는 '소를 죽이다', Part 3은 '심우록'(尋牛錄)이다.
시인 전원책의 저서로 이번 시집 '나에게 정부는 없다' 외에도 시집 '슬픔에 관한 견해'(1991)가 있으며, 시집 외에도 '바다도 비에 젖는다' '자유의 적들' '진실의 적들' '전원책의 신군주론' '잡초와 우상' 등이 있다. 136쪽, 1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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