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이 사람을 움직인다/콜린 엘러드 지음/문희경 옮김/더퀘스트 펴냄
카지노와 쇼핑몰의 공통점은 뭘까. 사람을 가둬 둔다는 것이다. 감옥도 아닌데,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하는 교실도 아닌데, 얼마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인데, 어떻게 사람을 가둬 놓는다는 걸까. 묘수가 있다. 스스로 오랜 시간 머무르게 유도하는 것이다. 카지노와 쇼핑몰이 그렇게 설계 및 디자인된다.
카지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승리로 위장된 패배'의 공간이다. 도박 기계는 이용자에게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사실상 돈을 잃는데도 돈을 따고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도록 설계돼 있다. 이길 듯 말 듯한 상황으로 심박수와 피부전도가 급격히 올라가게 만들고 뇌를 거부할 수 없는 흥분에 빠뜨려 돈을 더 쓰게 만든다. 그런데 이 도박 기계만으로 카지노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치밀하게 설계와 디자인된 공간이 필요하다.
카지노는 사람들이 도박 기계 앞에 앉기 한참 전의 단계부터 미끼가 설치되는 공간이다. 한 예로 카지노 입구는 곡선인 경우가 많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들은 직선으로 된 길보다 곡선으로 된 길을 지날 때 스트레스를 훨씬 덜 받는다는 주장이 있다. 인간의 DNA도 직선보다 곡선을 더 편안하게 느낀다는 분석이 있다. 환경심리학에서 곡선은 '수수께끼의 길'이다. 모퉁이를 돌면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 거라는 기대감을 계속 선사한다. 입구에서 슬롯머신 앞까지 이용자는 설렘을 가득 안고 이동하게 된다.
최근 카지노에는 일명 '놀이터 카지노' 설계가 도입되고 있다. 예컨대 에펠탑 같은 세계 유명 랜드마크의 미니어처를 도박장 주변에 배치하고, 베네치아 운하 같은 유명 관광지의 모습과 현장감 넘치는 소리도 보고 또 들을 수 있게 해 준다. 마음이 탁 트이는 관광지에서 당기는 슬롯머신 레버라니. 카지노 속 자연을 닮은 요소들은 마치 공원이 스트레스에 찌든 시민들에게 휴식을 주는 것과 같은 효과도 준다. 쾌락과 회복, 두 요소는 이용자를 어떻게든 카지노에 더 오래 있도록 만든다.
쇼핑몰도 카지노 못잖게 설계 및 디자인된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쇼핑을 해 왔다. 그런데 쾌락을 위한 쇼핑은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먹고사는 것은 해결하게 된 사람들이 뭔가 더 소유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각종 물건을 한자리에 모아 판매하는 백화점이 출현하게 된 것이다.
우스갯소리지만, 많은 남성들이 여성을 따라 백화점에 쇼핑을 가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어한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요즘 쇼핑몰은 꽤 방대하고 복잡하게 설계돼 들어온 사람이 자신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파악하기 힘들게 만든다. 구불구불한 통로가 많고 매장과 매장을 잇는 교차로는 비스듬하게 배치돼 있는 것이 그렇다. 또 거울과 반사되는 표면은 걷는 속도까지 늦추게 만든다. 이쯤 되면 어떤 이들은 지쳐 쇼핑몰 밖으로 뛰쳐나올 만하다.
그런 불상사를 쇼핑몰은 역시 공간설계 및 디자인으로 방지한다. 오히려 씨름에서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되치기' 기술처럼, 쇼핑이 주는 고통을 쇼핑에 대한 더욱 큰 욕망으로 치환시켜버린다. 치밀한 곡선 설계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물론, 사고자 했던 상품에다 뜻밖의 상품에까지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유쾌하면서도 목적이 불분명한 탐색을 기꺼이 하게 만들어, 필요한 물건 외에 온갖 물건을 사들일 가능성을 즐기게 만드는 것이다. 쇼핑몰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각본에 정해진 방향 감각 상실'의 공간이다.
카지노와 쇼핑몰 말고도 동서고금 문명 속 모든 공간에는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비밀이 숨어 있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또 미래에도 공간에 갖가지 욕망을 투영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불황에도 해외여행 시장만큼은 호황인 것은 익숙한 공간에서 벗어나 낯선 공간에서 감흥을 얻으려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최근 VR(Virtual Reality'가상현실)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고 또 대중화되고 있는 것도 보다 손쉽게 현실세계의 덫을 끊고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고 싶어서가 아닐까. 커다란 성당, 궁전, 비석 같은 공간이 랜드마크가 된 이유도 그 공간이 경외감을 불러일으켜서다. 불멸의 존재가 아닌 인간은 거대한 건물에 의지해 죽음 등의 공포를 누그러뜨리고 시간과 공간이 해체되는 마법 같은 경외감을 경험하려 한다.
저자 콜린 엘러드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는 건축 및 환경설계와 신경과학을 접목시킨 '심리지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다. 세계 각지에서 도시 걷기 투어를 진행하고 그 연구 결과를 공개하고 있다. 책 감수는 '과학 콘서트' 시리즈로 유명한 정재승 카이스트 교수가 맡았다. 371쪽, 1만7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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