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가 품은 인물 꽃으로 피다]<10·끝>영원한 우주 자연인 장현광

입력 2016-10-04 04:55:06

"천지는 잠시 머무르는 여관" 영원한 나그네 자처한 여헌

여헌 장현광이 모원당을 짓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심은 수령 410년 된 회화나무(보호수)와 장현광 선생의 양자 장응일(張膺一)이 세워 학문을 닦던 청천당(聽天堂) 전경.
여헌 장현광이 모원당을 짓고 조상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심은 수령 410년 된 회화나무(보호수)와 장현광 선생의 양자 장응일(張膺一)이 세워 학문을 닦던 청천당(聽天堂) 전경.
.여헌 장현광 선생과 후손들의 호패와 선생이 평소 사용하던 부채, 철경(거울), 삿갓 등 유물.
.여헌 장현광 선생과 후손들의 호패와 선생이 평소 사용하던 부채, 철경(거울), 삿갓 등 유물.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과 (사)여헌학연구회는 9월 30일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계명대학교 한국학연구원과 (사)여헌학연구회는 9월 30일 계명대학교 행소박물관에서 회원 등 3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낙중학(조선시대 낙동강 중류 지역의 유학)과 조선 초 구미지역의 유학'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여헌 선생의 저서인 역학속집과 그의 역학사상이 담긴 역학도설.
여헌 선생의 저서인 역학속집과 그의 역학사상이 담긴 역학도설.

◆천지는 만물이 잠시 머물렀다 지나가는 거대한 여관

장현광은 어려서 부친을 잃고 사방으로 다니며 글을 배웠다. 임진왜란 동안에는 가족을 거느리고 여러 지역의 친척과 친지를 찾아다니며 생존하였다. 절실한 삶의 체험이 그의 호에 반영돼 있다. 정처 없는 유랑을 의미하는 '나그네'(旅'여)와 일정한 거주공간을 지칭하는 '집'(軒'헌)의 상반되는 개념을 결합해 만든 호이다.

그가 말하는 '軒'은 고정적으로 붙박여 있는 거주 공간이 아니었다. 여헌 자신이 집에 있으면 그 집이 '軒'이며, 산속에 있으면 그 자체가 모두 그의 '집'이었다. 천지는 만물이 잠시 머물렀다가 지나가는 거대한 여관과 같다고 하였다. 이러한 시시각각의 '헌'에서 자신이 처해 있는 다양한 양태의 진리를 추구하는 현장으로 전화(轉化)시켜 놓았다.

"천지 사이에 붙어 사는 모든 물건이 나그네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며 "천지도 도(道) 가운데 한 나그네"라고 하면서 자신도 영원한 나그네임을 자처하였다. 그의 여행은 공간적 이동만이 아니었다. 역사적 여행을 통해서 현재의 인간 삶을 상대화하고 비판하면서 참된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였다.

◆철새처럼 떠나가신 어머니

인동의 진산인 천생산에서 야트막한 산줄기 하나가 서쪽으로 4㎞쯤 내달아 강 복판을 향해 멈추었다. 홍수가 질 때마다 깎이고 깎여 흙 속의 암석이 드러난 바위가 있다. 현광은 강물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하여 부지암(不知巖)이라 직접 이름 지은 바위에 앉았다. 건너편 강기슭의 모래톱에는 갈잎이 물들기 시작했다.

문득 올려다본 하늘에는 떠나기가 아쉬운 한 무리의 철새 떼가 맴돌고 있었다. 따뜻한 남쪽 나라로 떠나갈 새들의 힘찬 날갯짓을 바라보며 그들의 안녕을 기원했다. 자유로운 저들을 보고 있자니 누워만 계시는 어머니의 병세가 더욱 걱정되었다. 멀리까지 가서 좋다는 약은 다 구해다 드렸으나 병세가 더욱 심해지니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온 마음으로 봉양하려 했으나 도리어 어머니에게 걱정만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아팠다.

현광은 26세에 한강 정구를 삼촌으로 둔 정씨 부인과 혼례를 올렸다. 혼인한 지 6년 만에 부인은 겨우 젖 떨어진 딸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부지불식간에 지어미를 보내고 슬퍼도 내색조차 못 하는 아들을 바라보아야 했던 어머니였다. 홀아비로 어린 딸아이를 길러야 했던 아들의 처지가 안타까워 마음의 병이 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언덕 위에서 급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한 걸음으로 골목을 들어서니 여인의 곡소리가 담장을 넘었다. 얼마 전 아내로 맞은 송씨 부인의 절규였다. 잠시 머물다 떠나가는 철새처럼 그렇게 어머니는 떠나가셨다. 어머니가 가신 곳은 분명 따뜻한 곳일 거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애통한 마음을 추슬렀다. 부친의 산소 옆에 나란히 장사 지냈다.

◆피란처에서 서애 류성룡의 추천으로 보은현감에 제수

4대 사화와 두 차례의 반정(중종반정, 인조반정), 그리고 큰 전란(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 유학의 핵심인 도학 정신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던 시대였다. 선조 즉위 이후 정치적으로는 사림 정치가 시작되었지만, 사화의 후유증으로 인해 선비들이 국사에 참여하기보다 산림 속에 은거하는 풍조가 성행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북방의 여진과 남쪽 왜구의 침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인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북상하는 왜군의 길목에 있던 인동이 위태로워지자 상주의 몸으로 어머니의 신주를 등에 지고 피란을 떠났다. 그로부터 15년간 이곳저곳을 다니며 나그네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다.

출처관이 뚜렷한 그는 대사헌 공조 판서 등 대소 관직이 37회나 제수되었지만 출사한 것은 외직 두 번과 내직 세 번에 지나지 않았다. 선조 28년(1595) 42세의 현광은 여러 곳을 떠돌다가 의성군에 있는 누님의 마을로 피란하였다. 거기에서 서애 류성룡의 추천으로 보은현감에 제수되었다.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어지럽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는 모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마침내 보은현감에 부임하였다. 나라가 혼란할수록 아름다운 풍속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매월 초하루에 원로들을 모았다. 선행과 악행을 한 사람을 가려내어 상과 벌을 주었고 어려운 이웃을 보살폈다. 매월 보름에는 선비들을 회합하여 공부한 것을 토론하였다. 농한기를 이용하여 허물어진 논밭을 정비하게 하고 부녀자에게는 길쌈을 권장했다. 노인들에게는 짚으로 공예품을 만들어 팔게 했다. 고을은 차차 안정되었다.

◆속옷을 바위에 벗어두고

이듬해 3월에 현광은 건강이 나빠져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성들이 길을 막고 더 머물기를 간청하였다. 어질고 지혜로운 현감을 떠나보내기 아쉬운 이들은 자신이 직접 마련하고 키운 선물꾸러미를 내밀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그 유명한 속리산을 아직 구경 못 했으니 올가을에 구경 와서 그 때 같이 먹읍시다" 하면서 받지 않았다.

정들었던 충청도 땅을 벗어날 무렵, 커다란 바위 앞에 이르렀다. 잠시 쉬어 가려 몸을 바위에 기대었다. 현광은 여섯 달 동안 정들었던 보은 땅을 아쉬운 듯 돌아보았다. 그의 부인 또한 지아비의 눈길을 따라 촉촉한 시선으로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현광은 긴 여정을 앞두었기에 걸음을 재촉하려 부인을 일으켰다. 일어서는 부인의 치맛자락 사이로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속곳이 보였다. 가난한 살림에 비단옷을 사 입을 처지가 못 된다는 걸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부인, 못난 지아비를 만나 고생이 많구려! 부인에게 비단옷 한번 못 입혀 준 것이 못내 미안하오!"

"별말씀을 다 하시옵니다."

부인은 나쁜 짓 하다 들킨 사람처럼 움찔했다.

"그런데 그 옷은 어디서 났소?"

"옆집 복실네가 현감님 덕분에 밥을 먹고 산다며 어제저녁 기어이 두고 갔사옵니다. 길쌈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산 것이라 그 정성을 차마 거절하지 못하였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부인의 마음은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오. 그러나 하나를 얻으면 또 하나를 바라게 되오. 이 옷은 보은에서 난 것이니 보은 땅에 두고 갑시다."

현명한 부인은 부드러움 속에 감추어진 지아비의 엄한 꾸짖음을 알아차렸다. 말없이 돌아앉아 무명옷으로 갈아입었다. 벗은 옷을 차곡차곡 개어서 바위에 돌로 눌러놓았다. 그 후로 사람들은 이 바위를 속곳 바위 또는 치마바위로 불렀다. 충북 보은군 마로면 적암리에 가면 현광의 청렴한 삶의 표상인 듬직한 바위를 만날 수 있다.

◆피란처에서 서애 류성룡을 만나다

보은현감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집은 불타고 없었다. 다시 왜적이 침입한다는 소문이 돌아 피란을 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청송에 잠시 머물다 봉화 도심촌으로 옮겼다. 끝없이 떠돌아다녀야 하는 자신을 돌아보며 이때 호를 '여헌'이라 지었다.

이 무렵 도심촌에 미리 와 있던 서애 류성룡을 만났다. 보은현감에 추천해준 은혜에 대한 도리로 인사를 드렸다. 여헌이 돌아간 뒤 서애 선생은 아들 진에게 "여헌은 정신이 안정되고 확고하며 마음이 차분하고 생각이 깊으니 그 뜻을 빼앗을 수 없고 그 도량을 엿볼 수 없다. 그를 대하면 마음을 취하게 하니 뒷날 이름 있는 큰선비가 되어 유교를 주관할 것이다"고 하면서 나아가 배우도록 명령하였다.

난리가 끝나고 피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고향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집이 완전히 소실되어 갈 곳 없는 여헌을 위해 제자이면서 집안 손자뻘 되는 장경우와 일가 사람들이 힘을 합해 집을 지었다. 여헌은 그 집을 '모원당'이라 이름 짓고 기문을 직접 썼다. 광해 2년(1610년)에는 장경우를 중심으로 한 제자들이 합심하여 부지암이 있는 강변에 아담한 정사를 세웠고 여헌은 '부지암정사'라 이름 지었다. 그곳에서 학문과 도덕을 강의하였다.

◆인조대왕과 어수지교를 나누다

왕권을 믿고 독단을 일삼던 광해군의 시대를 지나 인조대왕이 새 임금이 되었다. 어지러웠던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재가 필요했다. 임금과 신하의 이상적인 만남을 물과 물고기의 만남이라 한다면, 인조대왕과 여헌을 일컬어 어수지교(魚水之交)라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임금은 신료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끌어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다. 그것은 신하에 대한 군왕의 예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인조대왕은 신하를 예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여헌에게 만류로 간청하였고, 멀리 있는 그를 불러올리기 위해 가마를 보내기도 했다. 병환 중에 있을 때는 내의원에서 지은 약을 내려보냈다. 신하인 여헌에게는 감동이며 관료로서 한없는 자부심이었다.

임금은 정치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던 여헌을 존경하고 사모한 나머지 가까이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세상이 어지럽고 불안할수록 그를 더욱 그리워했다. 여헌에게 의정부 우참찬의 마지막 벼슬이 내려졌다. 임금의 명령을 받은 여헌은 80이 넘은 노구를 끌고 기어이 길을 떠났다.

◆영원한 나그넷길로 떠나다

인조 5년(1627년)에 침입했던 후금은 인조 14년(1636년) 4월에 태종이 황제에 오르면서 국호를 청이라 하였다. 형제의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에 신하가 되기를 강제로 요청했다. 이를 거부하자 12만 대군을 거느리고 쳐들어왔다. 그 일로 인조는 삼전도로 가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강화조약을 맺었다.

그 소식을 들은 여헌은 수치스러움과 분한 마음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조상의 산소에 나아가 하직 인사를 올리고 속된 세상을 떠나 입암(포항 북구 죽장면 입암리)의 깊은 산골로 들어갔다. 그해 9월 7일 입암의 만욱재를 마지막으로 영원한 나그넷길을 찾아 떠났다.

인조는 그의 부고를 듣고 몹시 슬퍼하였다. 장사에 드는 비용과 일꾼을 보냈으며 조회를 폐지하고 애도의 뜻을 표하였다. 그의 영정에 제문을 지어 보냈다. 금오산 기슭에 있는 오산(구미 오태동)에 장사하였다. 효종 8년(1657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