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유희경의 시 '珉'

입력 2016-09-24 04:55:02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

유희경의 '珉'

옆에 선 여자아이에게 몰래, 아는 이름을 붙인다 깐깐해 보이는 스타킹을 신은 아이의 얼굴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 긴 소매 아래로 드러난 손끝이 하얗고 가지런하다 버스가 기울 때마다 비스듬히 어깨에 닿곤 하는 기척을 이처럼 사랑해도 될는지 창밖은 때 이른 추위로 도무지 깜깜하고 이 늦은 시간에 어디를 다녀오는 것일까 그 애에게 붙여준 이름은 珉이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아득한 오후만 떠오르고 이름의 주인은 생각나지 않는다(유희경의 전문)

젊은 시인 유희경이 '위트 앤 시니컬'이라는 시집 전문서점을 열었다. 파스텔뮤직이 운영하는 신촌의 카페 파스텔 한쪽에 자리 잡았다. 서점은 소규모 출판사에서 나온 시집에 특히 관심을 둔다. 매일 시인의 마음대로 '오,늘 서가'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새롭게 디스플레이한다. 시낭송회, 음악감상회도 진행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시가 다시 살아난다고 하자 유희경이 말했다. '시의 전성기가 언제 있었나요? 시는 그저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 사이에 존재할 뿐입니다. 흥한 적이 없으니 몰락한 적도 없고, 몰락한 적이 없으니 부활할 일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문현답이다. 유명 출판사에서 편집 일을 하다가 건강상의 문제로 직업을 바꾸었다. 유희경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시인과의 만남은 2010년 정도로 거슬러 오른다. 책쓰기 교과서 집필 문제로 처음 만났다. 솔직히 말해서 그때보다 지금 유희경이 훨씬 잘생겼다.

유희경 시의 본질은 부재(不在)이다.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음'이 아니라 '존재했다가 이젠 존재하지 않음'이다. 그런 부재는 지독하게 아프고 슬프다. 그것은 사람이기도 하고, 사물이기도 하고, 시간이기도 하고, 공간이기도 하다. 부재를 대면하는 유희경의 언어는 '슬프고 먹먹하고 설레고 안타깝고 외롭고 결연'(시집 『오늘 아침 언어』 뒤표지)하다. 그러면서도 유려하고 무겁지 않고 가볍다. 그는 그랬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희망이 있겠나. 반항보다는 한없이 비애에 젖어 슬퍼하는 태도지만 적어도 비겁해지지는 않으려 노력한다'라고. 이러한 세상에서 적어도 비겁해지지 않으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매일 비겁하다. 사람에게도 비겁하고, 사물에게도 비겁하고, 시간에도 공간에도 비겁하다. 그래서 그가 부럽다.

우연히 버스 안에서 만난 여자아이. 시인은 '珉'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珉'은 옥돌을 뜻하지만 중국어로는 옥 다음 가는 아름다운 돌이란다. 하지만 그러한 한자의 의미에 시인이 주목한 것은 아닐 게다. 그냥 우리말 '민'일 게다. 그런 기억들이 많지 않나? 스쳐 지나가는 인연들에게 나만이 붙인 의미. 아무것도 아니지만 모든 것일 수도 있는 것들. 그의 첫 시집 『오늘 아침 언어』에는 그러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나는 알지만 너는 모르는, 나는 부르지만 너는 듣지 못하는, 나는 기억하지만 너는 기억조차 없는 그러한 풍경들. 그것은 대체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수도 있는데 유희경의 시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프다. 그래서 유희경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게 김광석의 노래를 흥얼거린다. '또 하루 멀어져간다. 내뿜은 담배 연기처럼…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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