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부] 무력시위

입력 2016-09-23 04:55:01

1948년 6월 24일 소련이 '서베를린 봉쇄'에 착수했을 때 미국은 처음에는 군사적으로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현실은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 당시 소련은 동베를린과 그 인근 지역에 무려 150만 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반면 미국 영국 프랑스는 2차 대전 종전과 함께 징집을 해체한 결과 서베를린 지역에 주둔한 병력은 미국군 8천973명, 영국군 7천606명, 프랑스군 6천100명에 불과했다. 소련과 군사적 대결의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그러나 미국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당시까지 소련에겐 없었던 원자폭탄이다. 이를 이용해 소련을 겁주자는 것이 미국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실제로 사용 가능한 원자폭탄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8년 중반까지 제작 완료돼 실전에 투입할 수 있는 원자폭탄은 소련과 전면전이 벌어졌을 경우 선제공격 이후 소련의 반격 역량까지 파괴할 물량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미국은 기만 작전을 쓰기로 했다. 서베를린 봉쇄 직후 B-29 60여 대를 영국으로 날려보냈다. 여기에 원자폭탄이 실려 있으니 봉쇄를 풀라는 무력시위였다. 그러나 B-29에는 원자폭탄을 투하할 장비가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니 원자폭탄도 없었다. 스탈린도 이를 알았다. 당시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에 침투해 있던 간첩망을 통해서였다. 소련이 꿈쩍도 않은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1948년 6월 28일부터 11개월간 2억2천400만달러(요즘 가치로 31억달러)를 들인 '서베를린 공수작전'이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실행 의지와 이를 실현할 수단이 없는 무력시위는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절대 교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국이 북한의 5차 핵실험에 대한 군사적 대응 조치로 21일 장거리 전략폭격기 B-1B '랜서' 2대를 한반도에 급파해 DMZ(군사분계선) 코앞까지 무력시위 비행을 전개했다. 비무장으로 온 지난 13일과는 달리 이번에는 김정은이 가장 무서워한다는 지하시설 파괴용 정밀 유도폭탄을 탑재했다고 한다. 13일의 한반도 출격이 '이벤트' 성격에 그쳤다는 비판을 의식한 조치라는 해석이다.

과연 북한 김정은은 이에 겁먹었을까? 신경은 쓰이겠지만 별로 겁먹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핵과 미사일 도발 때마다 미국은 그런 무력시위를 했지만, 아직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실천 의지 없는 엄포도 김정은의 간을 키운 원인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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