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라언덕] 각자도생

입력 2016-09-23 04:55:01

'각자도생'(各自圖生). 사전적 의미로 '제각기 살아나갈 방법을 꾀함'을 뜻한다.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SNS에서는 'OECD 대한민국, 각자도생 불신지옥'이라는 풍자글이 등장해 급속히 번졌다. 어느 고등학생이 칠판에 낙서한 것으로 알려진 이 글은 '가만히 있으라'는 세월호 안내 방송 때문에 탈출 기회를 놓친 단원고 학생들을 떠오르게 했다. 세월호 참사가 촉발한 국가 불신 시대의 서막을 알리며 기성세대에게 경종을 울렸다.

그리고 2년. 각자도생이 또다시 회자하고 있다. 지난 12일 발생한 경주 지진 때문이다. 관측 사상 최대 규모(5.8)의 지진 앞에서 우리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또 한 번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이날 대구경북은 지진 대공포에 휩싸였다. 지진 발생 직후 진앙인 경주에서는 곳곳에서 주민들이 공포와 충격으로 쓰러졌고 119구급대 출동이 이어지는 등 아수라장이 됐다. 고층 아파트 주민들은 너도나도 집 밖으로 탈출하는 등 지진 공포가 대구경북 전역을 강타했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19일 규모 4.5의 강한 여진이 또 발생하면서 대구경북 시도민들은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정말 이러다가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이 닥치는 건 아닌지 불안에 떨고 있다. 19일 지진 당시엔 포항 여고생 2명이 지진 트라우마(정신적 외상)로 호흡 곤란을 호소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가슴이 답답하다거나 구토 증세를 호소하는 대구경북 시도민들이 속출하고 있다.

대구경북 시도민들의 지진 트라우마는 국가 재난 대응 시스템, 국가 재난 컨트롤타워의 부재와 맞물려 있다. 재난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믿음의 리더십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15년 전 2001년 9월 11일 아침. 역사상 최악의 테러로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무너졌다. 뉴욕뿐 아니라 미국과 전 세계가 공포에 휩싸인 순간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나타났다.

줄리아니 시장은 뉴욕 지역 방송사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사고 상황부터 시민들에게 알렸다. 그리곤 지금 안전을 위해 시민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이후 2~3시간마다 기자회견을 이어가면서 공포에 휩싸인 뉴욕 시민들에게 믿음을 줬다.

이에 반해 우리 정부는 시종일관 안이한 대처로 이번 지진 공포를 키웠다. 황교안 국무총리가 정부에 '피해자 구조와 복구에 만전을 기하라'는 긴급 지시 사항을 하달한 것은 12일 오후 10시 31분, 첫 지진 발생 2시간 47분 만이었다. 한반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지만 늑장, 뒷북 대응의 관행을 또다시 되풀이한 것이다.

국민보다 상급자를 우선하는 기상청 매뉴얼은 황당 그 자체다. '심야시간 지진 발생 시 장관에게는 가능하면 다음 날 아침에 전화보고 하라'는 기상청 매뉴얼 내용이 알려져 국민의 분노를 사고 있다.

공영방송인 KBS 또한 국가 재난 주관 방송사의 역할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다. KBS1 TV는 12일 오후 7시 44분 규모 5.1의 전진에 이어 8시 32분 규모 5.8의 본진으로 전국이 공포에 휩싸였을 때 정규 편성 프로그램인 '우리말 겨루기'와 드라마 '별난 가족'을 방송했다. 중간에 자막과 4분짜리 특보를 내보냈지만 그게 전부였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이번 지진이 수도권이 아니라 지방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라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

결국 정부를 믿을 수 없고, 기댈 수 없는 국민들은 "내 목숨은 내가 지킨다"며 각자도생에 들어갔다. 일본 도쿄도가 제작한 한국어판 지진 대비 매뉴얼을 내려받거나 생존 가방을 구매하고 SNS 지진통보 시스템을 활용하는 등 기가 막힌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이 국가를 믿지 못하는 세상, 살기 위해 스스로 몸부림쳐야 하는 세상. 어쩌면 지진 공포보다 더 두려운 현실은 리더다운 리더가 없는 대한민국, 각자도생 시대의 대한민국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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