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과 항일 사이 적일까, 동지일까'
1923년 황옥 경부 폭탄사건 토대로 일본 경찰·의열단원·밀정 암투 그려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코드' 벗고 스파이 누아르에 충실한 연출 돋보여
공교롭게도 올해 오랜만에 영화를 내놓은 거장 감독들이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준익의 '동주', 박찬욱의 '아가씨', 허진호의 '덕혜옹주'가 모두 관객 동원에 성공했다. 그리고 '라스트 스탠드'(2013)로 할리우드에 진출했던 김지운 감독이 3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 '밀정' 역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다. '암살'이 지난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둔 점은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의 연속된 제작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강점기 영화의 계속되는 제작은, 성공한 영화의 전례를 반복하는 경향이 있는 장르의 본질이 한 가지 이유이며, 또 다른 이유는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야깃거리로 떠오른 역사 담론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회자되는 친일파 문제와 건국절 논란은 현재 갈등의 사회상을 만든 뿌리로 일제강점기를 다시 공부하게 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김지운 감독은 이전에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를 만든 적이 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은 1930년대 만주를 근거지로 활약하는 독립군, 마적단, 일본군 간의 대결을 서부극이라는 장르의 틀 안에서 그려낸 작품이다. 김지운은 박찬욱과 봉준호가 스릴러에 집중하고, 이창동이 멜로드라마, 류승완이 액션, 이준익이 사극에 천착하는 등 감독들이 특정 장르를 계속해서 개발하는 것과 달리, 여러 장르들을 실험한다. 그는 코미디, 호러, 누아르, 액션, SF 등을 거쳐 이번에는 스파이 영화에 도전했다.
배경과 캐릭터로 인해 여러모로 한데 묶여 비교된 '암살'과 '밀정'은 장르가 다르다. '암살'이 액션과 로맨스를 엮은 대중적인 작품이라면, '밀정'은 묵직한 무드에 숙명적인 세계관을 가진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다. 아마도 '암살'만큼의 대중적인 호소력은 약할 테지만, 김지운의 예술세계가 이번에 폭발했다고 느껴진다. '밀정'은 일제강점기 배경의 영화가 가질 수밖에 없을 민족주의 코드와 비장함 및 비극성을 벗고, 스파이 누아르에 충실하게, 자유롭게 노닌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경험한 '놈놈놈' 이후, 김지운 감독이 비로소 작가감독으로 우뚝 섰다고 여겨진다.
1923년,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은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의 뒤를 캐라는, 일본인 상사인 경시의 특명으로 의열단 리더 김우진(공유)에게 접근한다. 양 극단에 서 있는 두 사람은 서로의 정체를 알면서 속내를 감춘 채 가까워진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정보가 쌍방 간에 새어나가고 누가 밀정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의열단은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할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기 위해 모이고, 일본 경찰들은 그들을 쫓아 상해에 모인다. 서로를 이용하려는 암투와 회유, 교란 작전이 숨 가쁘게 펼쳐지는 긴장감 속에서 폭탄을 실은 열차는 국경을 넘어 경성으로 향한다.
영화는 1923년에 실제로 있었던 '황옥경부 폭탄사건'을 토대로 한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이정출은 위장 친일파인지 아니면 의열단에 침투한 밀정이었는지 아직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리한 인물 황옥을 모델로 한다. 공유가 연기하는 김우진은 의열단 단원 김시현 선생이 모델이다. 이병헌이 특별출연해 연기하는 정채산은 의열단 단장 김원봉, 한지민이 연기하는 여성 의열단원 연계순은 현계옥 열사를 모델로 한다. 폭탄을 경성으로 가져오기 위해 벌이는 의열단원과 일본경찰, 그리고 보이지 않는 밀정 간에 펼쳐지는 며칠간의 암투와 대결이 영화에서 그리는 사건이다.
냉전기를 배경으로 하는 스파이물을 주로 만들었던 프랑스의 장 피에르 멜빌 감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실제 레지스탕스 출신인 멜빌 감독은 '그림자 군단'(1969), '한밤의 암살자'(1967)와 같은 영화들을 통해 '콜드 누아르'라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대사나 설명을 통한 정보의 효과적인 전달보다는, 잔뜩 멋을 낸 스타일이 클리셰(상투적인 표현)나 매너리즘으로 오인받곤 하지만, 그의 영화는 숙명론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무겁고 숭고한 아름다움이 있다. 김지운 감독은 이전 '달콤한 인생'이나 '놈놈놈'에서 성취하고자 했지만 도달하지 못했던 매너리즘 위에 선 숭고한 아름다움을 '밀정'을 통해 구현해낸다. 그는 의미의 무게감과 미학적 성취를 모두 달성했다.
일제강점기라는 무겁고도 진부한 소재는 다양한 장르적 진화를 겪으며 관객에게 새롭고 신선한 의미로 다가온다. 역사를 다루는 미디어가 가야 할 제대로 된 길이며, 계속해서 혁신하는 한국 영화에서 희망의 빛줄기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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