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의 문학노트] 있는 것보다 진실한 것

입력 2016-08-18 04:55:02

-이청준 ③ '이어도'

사람들은 때로 사실에서보다는 허구 쪽에서 진실을 만나게 될 때가 있지요. 그런 때 사람들은 그 허구의 진실을 사기 위해 쉽사리 사실을 포기하는 수가 있습니다. 꿈이라고 해도 상관없겠지요. 천남석이 이어도를 만난 것도 아마 그 사실이라는 것을 포기했을 때 비로소 가능했을 것입니다. 그가 주변의 가시적 현실을 모두 포기해 버렸을 때 그에게 섬이 보이기 시작했단 말입니다. (이청준의 '이어도' 중에서)

선생님께서는 '우리의 삶이나 이 세계는 논리와 논리 아닌 것, 혹은 일상의 삶의 덕목으로 선택된 질서와 그림자 그런 두 겹의 힘의 질서로 이루어져 나간다는 게 나의 인식이니까, 현상의 세계와 소망 세계의 관계라고나 할까'라고 하셨습니다. '이어도'는 바로 그 문제를 우리들에게 던지고 보여주고 질문합니다. 소설 속에서 현상의 세계와 소망의 세계는 어떤 관계이고 어떻게 우리 삶에 작용하고 있을까요?

이어도는 전설의 섬인 이어도의 실체와 그 의미를 탐색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탐색은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이 되는데, 하나는 이어도를 찾아가는 천남석의 탐색이고, 다른 하나는 천남석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는 선우현의 탐색입니다. 해군의 이어도 수색 작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것은 결국 이어도가 실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만들어냅니다. 현상의 세계에는 이어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작전의 실패가 사실로 확인되어가자 취재기자인 천남석이 점점 불안해했다는 것입니다. 천남석은 애초부터 이어도의 실체를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천남석이 실종됩니다. '왜 천남석이 실종되었을까? 그게 타의인가? 자의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열쇠를 찾기 위해 소설은 전개됩니다. 제주도는 고통의 땅입니다.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은 섬이 제주도입니다. 돌과 바람이 본질적인 것이라면 여자가 많다는 것은 역사적이고 환경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남자와 여자의 본질적인 비율이 육지와 크게 다를 바가 없겠지요. 다만 많은 남자들이 바다에 나가서 죽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제주도의 비극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연속된 비극 속에서 제주도 사람들은 이어도를 창조합니다. 죽은 가족들이 이어도에 가서 살고 있다고 믿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힘으로 제주도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죽으면 언젠가는 이어도로 갈 것이고,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을 현실에서 살게 했던 것입니다. 이어도는 그들에게 버릴 수 없는 꿈이자 어쩌면 현실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현상과 소망은 이렇게 만납니다. 제주도 토박이인 천남석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은 천남석은 자신도 깨닫지 못했지만 이어도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했던 것이지요. 제주도를 그렇게 미워하고 떠나고 싶었던 그도, 사실 그 이상으로 제주도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어도에 대해 부정하면 할수록 이어도의 존재는 자신의 전부가 되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해군의 수색작업은 그로 하여금 이어도의 실재에 대한 확인의 기회를 제공했고 결국 그는 그 부재를 확인하고 바로 실종되었습니다. 그의 실종은 의도적인 실종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문제는 그 의도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분명 이어도는 실재하지 않는 섬입니다.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에겐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부재하다는 것은 제주도 사람들의 꿈을 모조리 빼앗아버리는 것과 다름없는 셈입니다. 꿈이 없는 고통스러운 현실은 절망만 남으니까요. 제주도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있었던 천남석의 고민은 거기에 있었습니다. 수색 작업 결과 드러난 이어도의 부재는 천남석의 실종으로 되살아납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군인들이 보지 못한 것을 천남석은 보았으리라 믿습니다. 결국 이어도가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새로운 소망의 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다시 말해 천남석은 자신의 죽음으로 죽었던 이어도를 다시 살려낸 것입니다. 그것은 고통스러운 현상의 세계를 사는 제주도 사람들에게 다시 소망의 세계를 만들어준 것이지요. 이제 선생님이 쓰기를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소설 쓰기는 고통스러운, 또는 상처뿐인 현상의 세계에 대한 진술을 넘어 소망의 세계를 그립니다. 소설쟁이가 스스로 사실을 감출 수는 없지만, 그래서 현실을 왜곡할 수는 없지만 소망의 세계를 그릴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그 소망의 세계가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 소중한 현상의 세계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최신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