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칼럼] 현실주의와 광복

입력 2016-08-13 05:00:01

이제 광복절 일흔한 돌을 맞이한다. 70주년이면 기독교에서는 희년(禧年)이라고 부르는 자유와 해방의 해이다. 노예들이 해방 받아 자유인이 되고, 빚으로 빼앗겼던 땅을 원주인에게로 돌려주는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제도이다. 지난해 한국교회는 그런 희년의 경사가 이 한반도에 이루어지길 소망하면서 기도했었다.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그 시작의 모양이라도 나오기를 염원했다. 그러나 도리어 이 땅은 더 굳게 닫힌 억압의 땅이 되어가고 있다.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핵과 미사일 개발로 김씨 일가의 정권유지를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고, 남쪽은 사드를 배치하여 북의 핵과 미사일의 위협을 무력화시키겠다고 공언하면서 도리어 국민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있다. 이 땅에 희년의 나팔 소리는 사라지고 도리어 스스로 전쟁의 구도 속으로 빨려 든 것이다. 남북 모두가 평화를 위한 전쟁 준비의 모순에 빠진 것이다. 곧 힘을 키워 외부의 힘을 막아내겠다는 지극히 현실주의적 논리에 갇혀 자멸 혹은 자폭의 길로 가는 듯 매우 위험한 한반도 형세이다. 예수님은 로마 군병으로부터 스승을 지키려고 칼을 빼든 제자 베드로에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고 꾸중하셨다.

힘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 역사적 현실주의이다. 한 세기 전 일본에 우리 민족의 주권을 넘겨주었던 을사늑약의 근간에는 바로 이 현실주의적 힘의 논리가 작용했었다. 일본에 붙어 있어야 외부로부터 우리 민족을 지켜 전쟁 없는 나라가 될 수 있고, 일본에 통치권을 넘김으로 가난한 우리나라가 개화되어 굶주림과 헐벗음, 그리고 무질서에서 구원받는 유일한 길로 여겼다. 우리나라의 문명이 개화되고 삶의 질이 개선된다면 누가 우리를 다스리더라도 괜찮다는 판단이 곧 경술국치의 정치적 당위성이었고, 친일파들의 현실주의 명분이었다. 이런 생각은 우리나라를 일본에 넘긴 이완용과 그 일파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역사적 현실론자라면 누구나 쉽게 빠지는 함정이다.

한 예로 2천 년 전 이스라엘의 변호사 더둘로가 자기 민족을 다스리던 로마의 총독을 찬양하는 것이 성경에 나온다. "벨릭스 각하여 우리가 당신을 힘입어 태평을 누리고 또 이 민족이 당신의 선견으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로 개선된 것을 우리가 어느 모양으로나 어느 곳에서나 크게 감사하나이다"(행 24:3) 오늘도 현실주의자들은 사회 각 처에서 이런 힘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태평과 풍요, 배부름과 득세를 위하여 주권도 인권도 자유도 박애도 포기하려는 가치관이 오늘 우리 한반도를 휩쓸고 있는 것 같다. 북쪽은 오로지 지도층의 정권유지와 안정을 위하여 민족의 미래를 핵무기에 맡기고, 남쪽은 풍요와 배부름을 위하여 외세에 의존하면서 우리의 국방 주권을 잃어버린 채 언제 뜻밖의 전쟁을 맞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에 빠져 있다.

광복 71돌을 맞으면서 어떻게 하면 우리 민족에 광복의 완성을 이룰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배부름과 안전 추구의 현실주의가 국민들 머리에 만연되어 있는 한 진정한 광복은 요원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전쟁으로 빠져들게 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식민의 역사를 맞게 할 수도 있음을 깊이 고민해야 한다. 얼마 전 국가 미래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부서의 한 인사가 국민 대부분을 개나 돼지처럼 여기고 그들을 다스릴 지배 계층을 구축해야 한다는 망언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 고민해야 한다. 혹이나 국민들이 배만 부르고 전쟁만 없다면 누가 다스리고 통치하든 상관치 않는다는 노예적 태도가 그에게 엿보였을까? 만약 엘리트 지배 계층에게 일반 시민의 정서가 그렇게 보였다면 우리의 문제는 심각하다. 우리는 먼저 의식의 광복을 얻어야 한다. 현실적 힘에 기대어 안락을 얻으려는 현실주의적 가치관을 변혁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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