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 메고 세계 속으로] 태초의 신비, 캄차카<2>

입력 2016-08-12 05:00:02

30분마다 한 번씩 수십m 치솟는 뜨거운 물기둥…가이저 계곡 장관

캄차카 헬기 투어 중 가장 백미인 가이저 계곡 간헐천. 차상찬 사진작가
캄차카 헬기 투어 중 가장 백미인 가이저 계곡 간헐천. 차상찬 사진작가
설산차 뒤로 활화산의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설산차 뒤로 활화산의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노천온천.
사방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곳에 있는 노천온천.

꼼짝없이 설원에 갇혀버린 꼴이 됐다. 운전사인 마이클은 차에서 내려 눈을 한 움큼씩 뭉쳐 앞으로, 옆으로 던지듯 굴려본다. 원시적으로 경사를 확인하는 방법에 좁아진 나의 미간이 서서히 굳어갈 즈음 멀리서 점 하나가 움직인다. 투어 온 다른 차량을 발견한 것이다. 이내 밝아진 표정의 마이클이 그쪽으로 차를 몰아간다. 마이클이 다른 차량 가이드와 정보를 주고받는 사이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방광이 터질 듯해 지퍼를 내린다. 온통 하얀 설원에 길게 흔적을 남긴다. 이렇게 곱고 아름다운 화장실을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수백m나 되는 깊은 계곡 옆으로 아슬아슬하게 가던 차가 멈추어 섰다. 여기가 설산 차량 투어 중 가장 아름다운 뷰포인트라고 한다. V자형으로 깊게 파인 계곡에서 하얀 수증기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정상의 산꼭대기에도 수증기가 솜이불처럼 감고 있다. 여기가 활화산이란 것을 애써 보여주려는 듯 수증기는 세찬 바람에 흩어지다 다시 모인다. 하산하는 길은 훨씬 수월하다. 괴물처럼 생긴 설산차도 씩씩거림이 덜하고 마이클도 콧노래로 심정을 표현한다. 두어 시간이 지날 즈음 숲 속의 고요한 오두막집에 도착했다. 늦은 점심과 야외온천을 즐기기 위해서다. 가이드가 식사를 차릴 동안 엎어질 듯 마주한 설산을 배경으로 야외온천에 몸을 던졌다. 금방 곰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야외에서 엉성하지만 긴 나무 탁자 위에 차려진 진수성찬을 기다리며 반쯤 담근 온천에서 50도가 넘는 보드카로 목과 코를 감으니 네로 황제가 부러우랴, 진시황이 부러우랴. 그리 반갑지 않은 유황 냄새조차도 달콤하다.

캄차카시는 도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중심으로 길 양쪽으로 도심이 형성되어 있어 길 찾는 게 어렵지가 않다. 중심가에 큰 시장이 있어 여기서 가끔 식사도 해결하고 필요한 물품을 구입했다. 특히 세계 최고를 자랑하는 연어는 알과 여러 가지 형태로 요리되어 매일 우리 입을 즐겁게 해주었다. 약간 비릿하지만 짭조름하게 입에 감기는 맛은 숙소서 맥주를 바닥내는 데 역할을 톡톡히 했다. 늦은 저녁시간에 가이드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날씨에 따라 헬기투어가 취소될 수도 있으니 정확한 것은 내일 새벽에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한다. 난생처음 헬기를 탄다는 흥분과 날씨 걱정 속에 밝아온 새벽,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연신 창가를 내다보면서 걱정 반 기대 반이었는데 가이드를 대동한 차량이 숙소로 왔다. 다행히 헬기투어가 가능하다고 한다. 자그만 체구의 앳된 여성 가이드는 "안녕하세요"라며 또렷한 한국말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외국인 관광객이 거의 없는 이곳에, 영어도 잘 안 통하는 오지에서 한국말을 구사하는 현지인을 만나다니, 이 여성은 26세의 율리아. 2년 전 대구 영진전문대학에서 2년 과정을 졸업했다고 한다. 본인도 한국말을 하고 싶은데 한국 관광객이 거의 오지 않는 지역이라 우리를 보자 무척 반가운 표정이다. 덕분에 더 이상 어눌한 영어를 하지 않아도 되었다.

자동차로 1시간 정도 거리의 옐리조보공항 근처에 있는 헬기 전용 공항에 도착했다. 간단히 서류에 사인을 마치고 헬기에 올랐다. 20명 이상이 탑승할 수 있는 헬기 내부는 양쪽으로 길게 의자가 있고 동그란 창문은 개폐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 먼저 소음 차단용 헤드형 귀마개를 준다. 조종사를 포함해 스태프 4명과 우리 일행 5명, 폴란드 아가씨 1명, 그리고 러시아인 커플 4명 등 총 14명이 함께할 예정이다. 대부분 헬기는 처음이라 묘한 걱정의 표정들이 똑같이 잡힌다. 걱정과는 달리 부드럽게 이륙, 그리 높지 않은 고도로 날아간다. 제일 먼저 가는 곳은 간헐천으로 유명한 가이저 계곡. 여기서 약 180㎞ 거리. 헬기로는 약 1시간 소요된다고 한다. 상공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은 비행 내내 창가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군데군데 초록 이불을 기운 듯한 늪지대가 있는가 하면, 초콜릿 케이크를 덮고 생크림이 흘러내리는 듯 흰 눈으로 길게 치장한 산들도 있다. 약간 지루한 시간이 찾아올 즈음 가이저 계곡에 사뿐히 착륙을 한다. 현지 안내인이 안전구역 외에는 절대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무장을 한 경호원 한 명이 가이저 계곡 투어 내내 우리를 따라다닌다. 혹시 모를 야생 곰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서란다. 첩첩산중에 덩그러니 있는 거대한 계곡은 곳곳이 크고 작은 수증기로 뒤덮여 있다. 초등학교 교실 크기만 한 진흙탕에서는 솟아오르는 수증기를 몰래 감추려는 듯 연신 황토색 물방울이 생겨나고 터지기를 반복한다. 곳곳에 곰 발자국이다. 마침 멀리 산 언덕에서 곰 2마리가 싸움을 하는 모습을 보고 모두 흥분해 카메라를 들이대기 바빴다. 흔치 않은 광경이라고 한다. 30분마다 한 번씩 내뿜는 간헐천의 뜨거운 물기둥이 수십m를 치솟았다 사방으로 흩어진다. 첩첩산중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헬기에 탑승했다 하지만 좀체 이륙할 생각을 않는다. 다시 내리란다. 헬기에 문제가 발생해 고친 후에 출발한단다. 불안한 마음을 대자연에 맡기고 따스한 햇살을 쬐며 졸음과 싸우던 중 그제야 시동이 걸린다. 그사이 2시간이 흘러가 버렸다. 시간상 활화산 투어 한 군데를 빼먹는 일정이 못내 아쉬웠지만, 다시 한 시간가량을 날아 사방 모든 면이 설산으로 둘러싸인 어마어마하게 큰 분지에 내렸다. 여기에 자연 그대로 방치된(?) 노천온천이 있다. 물 온도는 우리나라 목욕탕의 뜨거운 탕보다 조금 낮을 정도로 적당했다. 들판 한가운데 멀리 설산을 보면서 즐기는 온천은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였다. 딱 하나 아쉬움이 있다면 출발할 때 보드카 한 병과 훈제 연어를 챙겨오지 못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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