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② '병신과 머저리'
나의 아픔은 어디서 온 것인가. 혜인의 말처럼 형은 6'25의 전상자이지만, 아픔만이 있고 그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나의 환부는 어디인가. 혜인은 아픔이 오는 곳이 없으면 아픔도 없어야 할 것처럼 말했지만, 그렇다면 지금 나는 엄살을 부리고 있다는 것인가. 나의 일은, 그 나의 화폭은 깨어진 거울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그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나는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망설이며 허비해야 할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나의 힘으로는 영영 찾아내지 못하고 말 얼굴일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료한 얼굴이 없었다.(이청준의 '병신과 머저리' 중에서)
선생님, 문학은 그 시대와 개인의 삶을 감당할 만큼의 알맞은 다양한 정신의 틀을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선생님께서는 1976년 이상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시대정신이란 인간의 삶과 정신의 다양성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나의 틀로부터의 해방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다른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조화롭고 풍성하게 꾸며 주리라는 희망과 믿음 가운데서 오히려 찾아질 수 있을"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나의 생각과 실천만이 진리라는 오만함보다는 내가 채울 수 있는 부분과 다른 사람들이 채울 수 있는 부분에 대한 상대적인 인식이 중요하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깊이 공감합니다. 틀을 강요하는 시대에서 문학의 역할은 점점 줄어듭니다. 문학의 역할은 틀을 깨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틀을 만들어 다양한 사람들이 그 틀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꿈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40년이 지나도 선생님의 말씀이 여전히 유효한 진리임에 감복하면서도 거기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아픈 존재입니다. 아프지 않다면 이미 생명이 사라진 것이겠지요. 다만 대부분 '병신'이 아니면 '머저리'로 살아가는 것이지요. 아픈데도 불구하고 병신과 머저리가 아니라면 성인이든가, 이미 인간임을 포기한 셈이지요.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혜인을 붙잡지 못했던, 나아가 그림으로 자신의 억눌린 욕구를 표현하고자 하는 머저리인 '나'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의 비인간성 속에서 자신에 대한 극도의 환멸을 맛보았던, 그리고 그 환멸에 대한 분출구로서 소설 쓰기를 택한 병신인 '형'.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면 아픈 곳이 어디인가를 알고 아픈 '형'과 아픈 곳이 어디인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나'. 그 둘은 현실 속에서 아프게 살아가는 현재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고 내 안의 두 형상이기도 합니다. 세상에는 아픈 사람으로 넘쳐납니다. 그에 따라 점점 첨단화되고 있는 병원뿐만 아니라 온갖 치유 프로그램도 난무합니다. 이 정도라면 눈에 보이는 아픔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까지도 존재하지 않아야 할 듯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픕니다. 그것이 신기합니다. 병원이나 치유 프로그램 때문에 사람이 아파야 하는지, 아픈 사람 때문에 병원과 치유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는지 헛갈립니다.
선생님, 소설에서 선생님은 그렇게 말하고 싶으셨겠지요? '형'이 소설 쓰기를 통해, '나'가 그림 그리기를 통해 그랬던 것처럼 아픔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은 나의 아픔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결국 아픔은 완전히 치유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아픔이든지 눈에 보이지 않는 아픔이든지 치유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아픔은 다시 다른 얼굴로 우리들에게 침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시 쓰고 다시 그려야 하는 것이겠지요? 결국 우리 삶은 아픔에 대해 쓰고 그리는 과정으로 존재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 아픈 곳이 어디인가를 알고 쓰는 '형'과 아픈 곳을 모르면서 그림을 그리는 '나'가 만날 수 있는 길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선생님, 세상이 나를 표현하고자 하는 개인의 행위를 통제해서는 안 됩니다. 쓰는 행위이든, 그리는 행위이든 개인에게는 존재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헌법에도 표현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글을 쓰다 보니 앞의 글 '소문의 벽'과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선생님께서 그렇게 강조하신 것이 무엇인가도 어렴풋이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도 소설 속의 '형'은 소설을 완성할 것입니다. '나'도 그림을 다시 그리게 될 것이고요. 그러면서 쉽지는 않겠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주는 시간도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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