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우는 여자

입력 2016-08-05 05:20:04

이숙경.
이숙경.

열기를 떠도는 미립자에게 내어준 거리는 온통 속수무책이다. 숨조차 가누기 힘든 날씨에 설상가상 발을 옥죄는 하이힐 때문에 가야 할 목적지는 뒷전이고 어디든지 자리가 보이면 앉을 궁리를 했다. 다행히 그늘에 있는 벤치가 눈에 띄었다. 혼자 멀거니 앉아 있으면 멋쩍을 텐데 모시옷을 차려입은 중후한 여인이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있어 안심하고 다가갔다. 그런데 가까이 갈수록 앉는 것이 망설여졌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실례인 줄 알지만 더 이상 걷거나 서 있을 수가 없는 처지여서 울음이 깔린 자리를 뭉개고 앉았다. 그 여인에게 우는 까닭을 물을 수도 없고 위로하기도 난감하나 최소한 예의가 있는 행동이라면 슬픔의 종류는 다르겠지만 내게 슬픔을 주었던 일을 떠올리며 눈빛으로 동조해 주는 일일 것이다.

옆자리에 앉자마자 들키지 않게 그녀가 왜 우는 것일까 이유를 추측해 보았다. 차림새나 생김새를 보면 아름답게 나이를 먹고 부유해 보여 울 일이 없을 것 같은데 곁에 사람이 다가와 앉는데도 불구하고 흐느끼는 것을 보면 체면 따위는 아랑곳없는 깊은 슬픔이 있나 보다. 문득 그녀가 부러워졌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지 않고 슬픔에 푹 빠져 눈물샘에서 연신 길어 올리는 그녀의 눈물은 삶의 진정성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눈물이 희박해진 나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내 삶이 행복한 일만 계속되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많은 기쁨과 얼마나 많은 슬픔이 대기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어리석게도 그동안 감정을 지나치게 억눌러 기쁜 일은 들뜨지 않게 기뻐하고, 슬픈 일에는 울음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방습제로 도포해 버렸다.

나도 때로 미어지게 가슴이 아프고 슬플 때 그녀처럼 눈물을 펑펑 흘려버리고 싶다. 좁은 어깨를 들썩이며 흘린 눈물이 드넓은 땅을 적시지는 못할 것이다. 지나가던 바람이 금세 말려버릴 것이고 때로는 빗물이 은닉해 줄 것이니 누구의 눈에 띌 리 만무하다.

몇 해 전 '울지마 톤즈'라는 영화에서 아프리카 수단의 아이들이 처절하게 열악한 환경에 살면서도 눈물 흘리는 법을 모르고 살다가 삶에 희망과 깨달음을 준 이태석 신부가 돌아가셨을 때 슬픔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울 때까지 울어 눈물의 끝을 본 사람이라면 눈물에 닦인 뜨거운 삶의 길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울보 시인 박용래는 눈물이 삶의 충실한 일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다.

이 더위에 우는 일이라면 회색빛 구름 뭉치처럼 무겁고 우울한 일이다. 하지만 그 구름을 한 칼의 번개로 관통하여 열병을 앓고 있는 도시에 소나기를 퍼붓듯 내면에 쌓인 찌꺼기를 씻어내는 눈물이라면 얼마든지 속 시원히 울어도 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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