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이단원 여사가 본 아버지 이경희
"매일 새벽 집을 나서서 들판을 헤매다 먼동이 트면 가족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한배님, 이 나라를 독립시켜주소서'하며 기도를 했지."
이경희 선생은 일제가 태평양전쟁으로 광분하던 1942년 여름 서울 돈암동에서 대구로 낙향했다. 고향에서 20여 리 떨어진 벽촌의 청석 땅 위에 회초리만한 사과나무를 심고 퇴비로 쓸 개똥을 모으기 위해 새벽부터 가족들은 집을 나서야 하는 적빈한 살림살이였다. 선생 몰래 부인 조 씨가 청도에서 교사 생활을 하는 둘째 사위한테 보리쌀 한 말을 얻기 위해 백리길을 나서야 했다. 보리쌀 한 말로 선생의 가족이 몇 달을 연명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서간도 망명 시절부터 민족 종교인 대종교를 신봉하고 계셨던 것 같아. '참의'라는 직책이었는데, 이시영 씨가 바로 참의였어."
이경희 선생은 대종교 남서도본사선범 상교였다. 청산리대첩을 이룩한 김범도와 김좌진 등 북로군정서 무장독립군이 바로 대종교의 창시자인 서일의 지휘 아래 있었고, 군대의 대부분이 대종교 교인이었을 만큼 당시 대종교는 무장독립운동의 주축 세력이었다. 그만큼 일제의 탄압도 극심했다. 선생의 협성중학 동료교사였던 제3대 도사교 윤세복 선생은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그러나 선생은 종교를 포기하지 않았고, 창씨개명도 끝까지 거부했다.
"우리 가족들이 아버지 앞에서 다리 한 번 뻗어보지 못할 정도로 엄격하셨어. 특히 교회를 싫어했어. 둘째 재우 오빠가 어머니 따라 교회에 다녔는데, 우리 식구들 중 어느 누구도 식사 전후에 기도를 할 엄두를 내지 못했어. 그런데 어느 날 재우 오빠가 밥상머리에서 기도를 한 뒤 식사를 했지."
가족 모두는 긴장했다. 무슨 불호령이 떨어질지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경희 선생의 반응은 의외였다.
"우리 재우는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되겠다.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당당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제대로 된 사람이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하루는 이단원 여사가 어렵게 노천명 시인의 시집을 구해 읽고 있었다. 이를 본 이경희 선생은 "뭘 보고 있냐. 이리 줘 봐라. (시집을 살펴본 뒤) 별로 잘 쓴 시가 아니다"면서 퉁명스럽게 도로 던져 주셨다.
전 재산과 전 인생을 독립운동에 바친 이경희 선생은 결코 좋은 아버지나 남편이 될 수는 없었다.
▶이경희 선생 관련 첫 논문 발표한 김일수 교수
"1990년대 이후 한국 근현대사 인물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그런데 이 연구에서 이경희 선생은 빠졌습니다.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매일신문 창간 70주년을 맞아 '독립운동가 이경희와 대구의 독립운동' 특별기획전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독립운동사에 등장한 인물들도 있었습니다. 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을 찾아내고 널리 알리는 것은 후손된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경희 선생 관련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한 김일수 금오공대 연구교수는 "전국적 관심을 끌고 있는 대구근대골목투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몇몇 인물만이 반복적으로 조명되는 경향이 있다"면서 "대구가 그동안 우리의 숨겨진 역사와 인물을 발굴하는데 얼마나 소홀했던가를 보여주는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대구 무태 출생의 구찬회 경우 이경희 선생의 연구로 새롭게 드러났다. 구찬회는 191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사망했다. 그가 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고 그곳에서 죽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제가 시신조차 감시했던 것으로 보아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을 개연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구찬회와 같은 고향인 이경희 선생은 일제의 눈을 피해 시신을 미역으로 감싸 숨기면서 경성(서울)에서 대구 무태까지 옮겨와 가족들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인계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경희 선생과 관련, 김 교수는 "서울의 기호중학에 입학한 것이 이경희 선생 인생의 전환점이었던 것 같다. 기호중학에서 한국의 근대를 조망할 수 있게 됨에 따라 다양한 단체를 통해 역동적인 계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교남교육회와 대한협회 대구지회, 달성친목회 등은 실력양성론적 계몽운동에 가까웠고, 대동청년단과 청년학우회 한성연회 등은 독립전쟁론에 근접해 있다"면서 "결국 이경희 선생의 독립운동론은 실력양성론에서 독립전쟁론으로 연결되는 특징을 보인다"고 설명했다.
더욱이 "이경희 선생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조선노동공제회, 단연동맹회 등의 운동을 거쳐 1927년 민족협동전선운동으로 전개된 신간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면서, 동시에 조선경제연구회 결성, 중외일보 회생 운동에도 참여한다"며 "이처럼 이경희 선생은 좌우를 포함하는 다양한 인맥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이경희 선생의 생애와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계열에 속하면서도 좌파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1948년 남북 분단을 경험한 뒤 1949년 사망함으로써 그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통해 이룩하려 했던 통일국민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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