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우리의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도시

입력 2016-08-02 05:20:01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경북대(석사)·모스크바 국립사범대(박사) 졸업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러시아 우수리스크

소련 해체 후 갈 곳 없어진 고려인들 정착

고려인 재이주 도우는 사람들 많이 늘어

통일 후 새로운 역사 만들어갈 미래 준비

해외봉사활동을 자원한 학생들과 7월 11일부터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서쪽으로 112㎞ 거리에 위치한 이 도시는 우리 역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발해의 5경 15부 중 솔빈부가 위치했다고 하며, 근대로 와선 러시아로 이주한 고려인들이 터를 잡고 살았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 중 하나였다. 소련시절 극동 거주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열차가 출발했던 곳도 멀지 않은 라즈돌리노예 역이었다. 이 조용한 도시에는 잊고 있던 우리 역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작은 도시라 2, 3일 정도 지나니 금세 익숙해진다. 북쪽으로는 고려인 정착촌이, 남쪽으로는 헤이그 밀사 중 한 명이었던 이상설 선생 유허비와 발해의 옛 성터가, 중심가엔 고려인 문화센터가 있는 이곳은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거리에서는 러시아인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고려인, 최근 늘어난 한국 관광객들과 일본인들도 쉽게 볼 수 있다. 언어를 몰라 낯설어하던 학생들은 한국어를 전공하는 러시아 학생들과도, 러시아어밖에 못하는 고려인 청소년들과도 즐겁게 소통한다.

교육봉사활동이 진행되는 극동연방대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죽임을 당하기 직전까지 기거했던 집이 있다.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때 실질적으로 후원했으며, 의사가 처형된 후 그 가족을 보살핀 사람도 최재형이었다고 한다. 혁명과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연해주가 일제의 세력하에 있던 1920년, 최재형은 일본군에게 체포돼 총살을 당하고, 고려인 수백 명도 일본군에게 집단학살을 당했다. 제헌절 아침, 기특하게도 태극기까지 미리 준비해온 학생들과 그곳을 찾았다. 얼마 전 외교부에서 집을 구입했다는 이야기는 들리지만, 우리말과 러시아어로 적힌 작은 현판 하나뿐, 마당에 풀이 무성한 채 집은 방치돼 있다. 내내 재잘대던 학생들도 그곳에선 숙연해진다.

얼마 전엔 노력 봉사의 일환으로 고려인들이 살고 있는 농촌을 찾았다. 끝없는 평야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농가들, 그중에 비닐하우스가 있는 집은 예외 없이 고려인들이 사는 곳이란다. 땅이 넓어 가도 가도 평원인 이곳이지만 고려인들은 작은 땅도 허투루 두지 않는다. 이들 대부분은 소련 해체 이후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재이주해온 사람들이다. 19세기 중엽 가렴주구를 피해 이주했던 고려인들은 주로 극동 연해주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타고난 근면함으로 겨우 자리를 잡았을 무렵 조국은 일제에 강점당했다.

연이은 혁명과 내전, 공산화에 힘겹게 살아가던 1937년, 스탈린의 소수 민족 억압 정책에 따라 고려인 인텔리들은 대대적으로 숙청을 당했고 민초들은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이송되었다. 이름도 낯선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에서 다시 뿌리를 내린 고려인들은 50여 년 후 소련이 해체되고 이들 나라에서 배타적인 민족 정책을 벌이자 다시 갈 곳이 없어졌다. 당시 수많은 고려인들이 돌아갈 고향으로 여겼던 곳이 남한도 북한도 아닌 이곳, 연해주 우수리스크였다고 하니, 이 역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 역사와 긴밀히 연관된 이곳에서 새로운 미래를 만드는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극동연방대학 한국어교육과의 나제즈다 교수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재이주해온 고려인으로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 풍습까지 가르치려 노력하는 분이었다. 러시아 정부조차 신경 쓰지 않는 노숙자들을 위해 쉼터를 마련하고 재활을 돕는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신부님과 수녀님들, 중앙아시아에서 재이주해온 고려인들의 정착을 돕는 전직 수학선생님 니나할머니, 가까운 한국과 더 친밀한 관계가 이뤄지길 희망하면서 열심히 우리말과 문학을 공부하는 한국어과 학생들, 며칠 배운 한국어와 몸짓으로 먼 조국에서 온 친구들과 열심히 소통하는 고려인 청소년들, 이들 모두가 통일 이후 새로운 역사를 만들 미래이다. 지도를 확인해 보니 우수리스크에서 서울까지는 겨우 800㎞ 남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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