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를 놓칠세라, 150m 지점에 있는 갈대밭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일어나서 달리고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얼마를 그렇게 내달았을까. 저 멀리 불빛만 가물가물하던 보일러 공장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세리나의 집으로 가기 위해 알마타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로 향했다. 어떻게든 우즈베키스탄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무려 3개국의 국경을 빠져나온 기쁨은, 방금 지나쳐 온 경찰관 어깨라도 툭툭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그런 여유를 찾게 해 준 것일 테지만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6. 탈출
"아이구 배야, 아이구우…."
밖이 어두워질 무렵, 배가 아프다는 핑계로 오만 죽을상을 하면서 화장실에 갔다. 숙소에서 대략 20m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재래식이었는데, 들어서기가 무섭게 깁스의 구조부터 살핀 다음, 대못으로 꼬아서 고정시킨 깁스의 연결고리를 칼로 풀 수 있는지 견주어 보았다. 밖은 영하 40℃를 넘나드는 혹한이었다. 사방에는 다리가 푹푹 빠질 만큼 눈이 쌓여 있었지만 보위부원은 변소 밖 저만치서 감시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었다.
변소를 몇 번 오가는 동안 깁스를 찬 상태에서 컨테이너까지 얼마나 걸릴까 가늠해 보니 대략 2분 정도였다. 과연 내가 변소 밖으로 나갔을 때 보위부원이 먼저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가 줄 것인지가 관건이었다. 눈썹으로 올라간 입김이 허옇게 엉겨 붙는 추위에 깁스를 찬 죄수가 못 미더워 끝까지 버티고 서 있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일부러 더 느린 걸음으로 어기적거리면서 배가 아픈 시늉을 해가며 최대한 걸음을 아꼈다. 저녁 어스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본다면 영락없이 깁스를 찬 걸음새로 보였을 것이다.
예상이 적중했다. 내가 몇 발자국 옮기니까 그가 바로 등을 보이고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때를 놓칠세라, 150m 지점에 있는 갈대밭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일어나서 달리고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생애를 통틀어 행동을 그렇게 민첩하게 했던 기억이 이후로는 없다. 2분 동안 그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 실패할 확률이 높았는데 만약 그들과 마주치게 되었다면 아마 나는 그때 가지고 있던 칼로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
내가 엎드리고 누운 갈밭 주변으로 웅성웅성 사람 소리가 나고, 연이어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저만치로 흩어져 갔다. 불과 몇 분 상간이었지만 천 년이 흐른 듯한 상황에서, 누운 채로 잠시 올려다본 밤하늘엔 별들이 영롱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무작정 뛰고 또 뛰었다. 사위에 추적자와, 공포와, 바람과, 추위에 쫓기면서 어두운 벌판을 가로질러 기를 쓰고 뛰었다. 만일을 대비해 전에 봐두었던 러시아 측 보일러 공장 쪽으로 방향을 가늠해서 뛰고, 기고, 포복을 반복해가며 죽을힘을 다해 달렸다. 얼마를 그렇게 내달았을까. 저 멀리 불빛만 가물가물하던 보일러 공장이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 그때는 러시아 말도 잘 할 줄 몰라서 가까스로 공장 문을 열고는 겨우 "춥다. 좀 도와 달라"라고 알고 있던 기본적인 단어 몇 마디를 되뇌다 정신을 잃었다.
눈을 떠보니 공장에서 일하는 러시아 노인 한 분이 보일러 옆에다 자리를 깔아서 눕혀 놓고 내 몸을 열심히 마사지하고 있었다. 내가 깬 걸 알고는 보드카 한 잔을 부어주면서 마시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내 행색을 보고 처지를 짐작한 듯 말 안 해도 다 안다는 식으로 허름한 작업복과 빵 하나를 던져주면서 연신, 먹고 입으란 시늉을 해 보이는 것이었다. 그 노인 덕에 갚을 수도 없는 은혜를 입고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나는, 다음 날 새벽 날이 새기가 무섭게 연료 공급차가 온 걸 보고 그 차에 올라탔다. 노인이 기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기사는 말없이 시동을 걸었다. 차를 타고 가는 동안 나는 속으로 러시아 국경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세리나에게 연락이 닿아, 거짓말처럼 다시 그녀를 만날 수가 있게 되었다. 구사일생, 꿈만 같았다. 그때 난, 본격적인 도피 준비를 할 수 있게 된 일을 두고, 한 번도 믿은 적이 없었던 천지신명께 감사했다.
7. 사선(死線)에서
러시아 '블라고웨친스코'에서 세리나의 조국인 카자흐스탄 '알마타'까지 가는 동안엔 화장실에 숨기도 하고, 또는 대담하게 열차 승무원실로 들어가 여기가 따뜻하다며 술을 사주기도 하면서 국경을 통과할 때까지 검문 없이 중간 지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의붓딸 따냐와 손잡고 세리나와 짐짓 가족 행세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검문소의 감시를 벗어났다.
세리나의 집으로 가기 위해 알마타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우즈베키스탄 수도 타슈켄트로 향했다. 그러나 우즈베키스탄 국경 검문을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 하는 난제가 또 남아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넘어가야 할 마지막 관문이었다. 출발 지점에서 1만㎞ 여정의 종착지인 우즈베키스탄 국경에서 만약 러시아든, 카자흐스탄이든, 우즈베키스탄이든 출입국 관리요원에게 잡히면 북한으로 압송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라 아마 '걱정이 반찬이라면 상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또 한 번 사선을 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공포가 심장을 있는 대로 조이고 들어왔다. 위기에 직면한 지독한 두려움이었다. 그렇다고 혼자 카자흐스탄에 주저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세리나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나마 도움을 받을 곳도 없는 데다가 더욱 위험한 지경에 처해질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이라 어떻게든 우즈베키스탄을 뚫고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버스에서 내린 승객들이 검문 차례를 기다리느라 한 줄로 길게 늘어서 있는 앞에서 출입국 관리요원 두 사람이 패스포드 검사를 하고 있었다. 난 차례를 기다리는 대열에서 조금씩 비켜나며 출입국 관리요원의 등 뒤쪽으로 침착하게 한 걸음씩 물러났다. 그러면서 세리나의 손을 잠깐 쥐었다 놓는 것으로 내 무언의 메시지를 건넸다. 그렇게 관리요원의 시야를 완전히 등진 위치라고 판단한 순간, 뒤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운명을 하늘에 맡긴다는 심정으로 그렇게 행동했다. 태연을 가장한 채 대략 한 5m쯤 될 것 같은 거리에서 뒤돌아보았을 때, 검색을 마친 세리나가 나를 향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잔뜩 긴장했던 위기감이 그제야 진정되는 걸 느꼈다.
그것이 마지막 사선인 줄 알고 가벼운 마음으로 국경을 통과했으나 그 기쁨도 잠시, 이번엔 바리케이드가 앞을 턱 가로막고 있었다. "아, 이젠 도리 없이 죽었구나." 그야말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슨 재주로 저 바리케이드를 넘는단 말인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그대로 털썩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사색이 된 내 눈치를 보면서 세리나가 속삭였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살얼음판을 딛고 서 있다고 한들 그보다 더 조마조마할까. 한데 슬며시 다가가서 보니까 그 바리케이드는 차량을 통제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처지가 처지인 만치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 격이었다.
경찰이 지키고 있는 바리케이드 옆으로 우리 가족이 유유히 빠져나왔다. 내가 타냐를 안았고 세리나가 내 손을 잡았으니 누가 보면 우리는 영락없는 한가족임이 분명하였다. 우리의 연출이 또 한 번 성공을 한 것이다. 사실 당시엔 경찰 소리만 들어도 기겁을 하던 때라 천신만고 끝에 무려 3개국의 국경을 빠져나온 기쁨은, 방금 지나쳐 온 경찰관 어깨라도 툭툭 쳐주고 싶을 정도였다. 죽음의 사슬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이 그런 여유를 찾게 해 준 것일 테지만 온몸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디서 사이렌 소리만 나도 간이 철렁철렁하던 날들이 불과 얼마 전 일이었단 사실이 영 실감 안 나고 그야말로 한바탕 악몽을 꾸고 난 것 같았다. 형언할 수 없는 공포에 짓눌린 채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도망자 신세. 등대 불도 없는 밤바다에서 풍랑과 사투 중인 난파선이라면 어느 방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인들 역풍 아닌 것이 있었겠는가. 만약 그 상태에서 잡혔다면 불문곡직, 바로 북송되었을 테니 살아도 난 산목숨일 수가 없었다. 체제에 속아 살았던 건 태어난 조국의 정치적 이념이나 환경 탓이라고 치부하면 위로라도 되지만, 보위부원들이나 악랄한 간부한테 당한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부르르 치가 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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