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춘추] 사랑해요, 치매

입력 2016-07-24 15:46:18

늦은 봄날이었습니다. 딸아이를 학교에 바래다주고 돌아오는 길에 벚나무를 만났습니다. 꽃이 다 지고 새 잎을 막 틔우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마치 꽃이 피어날 무렵의 모습과 같았습니다. 쇠락한 분홍의 망울에 연초록이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제 어머니는 6년째 요양병원의 치매병동에 있습니다. 다행하게도 이곳 병실은 온돌방이어서 어머니는 어린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바닥을 엉덩이로 밀고 다닙니다. 그런 힘조차 없는 할머니는 몸을 말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자궁 안의 태아 같습니다. 오래도록 그런 자세로 있어서인지 욕창이 생겼나 봅니다. 붉게 짓무른 상처에 간호사가 연고를 발라주고 있습니다. 늙은 누에가 고치를 짓고 날개의 시간을 기다리듯이 이승을 건너갈 각자의 날개를 짜고 있습니다. 이곳의 시간은 산만(散漫)하지만 고름처럼 고여 있습니다.

제 어머니가 계신 병실의 창문은 넓어서 볕이 바릅니다. 하지만 이 방의 계절은 창에서만 머물다가 창으로 사라집니다. 계절을 잊으니 나이도 잊고 맙니다. 어머니에게 저는 외삼촌이었다가, 남편이었다가, 손녀였다가, 정신이 잠깐 돌아오면 이제야 자식입니다. 같은 방에는 어느 여학교의 음악선생님이었던 할머니가 있습니다. 밥을 드시는 시간을 빼고는 '봉선화' 노래만 불러서, 제가 '봉선화 할머니'라고 이름을 붙여 드렸습니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 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이 노래를 잠들기 전까지 부른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는 종일을 울어도 목이 쉬지 않듯 할머니의 노래는 맑았습니다. 어머니 간식 몇 가지를 병실의 냉장고에 넣고 도망치듯이 병실을 빠져나옵니다. 봉선화 할머니의 노래가 저를 따라옵니다.

우리나라 60세 이상 노인 10명 가운데 4명은 암보다 치매에 걸리는 것을 더 무서워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제가 6여 년을 치매병동에 드나들며 할머니들을 자세히 살펴보니, 살아온 삶이 치매의 증상에 그대로 나타나는 것 같았습니다. 순하게 살면 순하게, 거칠게 살면 거칠게 치매를 앓는 것 같았습니다. 노인은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는데 그 기억의 팔은 바로 앞이 아닌, 조금 먼 곳을 향해 뻗습니다.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선하고 순하게 생을 살아낸다면 치매도 착하게 앓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머니는 뼈에 살가죽만 남았습니다.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잎이 나무를 떠납니다.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라고. 조금이라도 짐이 안 되려고. 제 어머니도 때가 되면 그렇게 저를 떠날 것입니다. 떠난 후에도 어머니는 제 몸에 계실 것입니다. 어머니를 여름날의 푸른 잎처럼 높이 매달고 나부끼게 하려면, 지금부터라도 좀 제대로 살아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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