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나한테는 다른 지역에 있는 선생님들로부터 메시지가 자주 온다. 그 대부분은 프로야구 원년 삼성 라이온즈 어린이 회원인 나에게 보내는 위로와 놀림이다. 1990년대 암흑기도 이렇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올해 같은 상황이 되고 보니 한화나 엘롯기 팬들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침 정호승 시인의 '슬픔이 기쁨에게'를 수업했는데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주겠다.'라는 부분을 해석하면서 "네가 야구팬으로서 가졌던 기쁨은 한화, 엘롯기 팬들로부터 빼앗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기쁨은 불평등하다고 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도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메시지 중에는 "꼴찌에게 갈채를 보냅니다."라는 것도 있었다. "꼴찌에게는 욕을 해야지 왜 갈채를 보내?"라고 답하면서 문득 학창 시절 감동하면서 읽었던 박완서 작가의 대표 수필인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다시 꼼꼼히 읽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수필의 내용은 버스를 타고 가던 작가가 마라톤 대회 때문에 길이 막히자 내려서 구경을 했는데, 1등이 들어온 한참 뒤에 뛰는 주자들의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보고 아낌없는 환호와 갈채를 보냈다는 단순한 것이다. 작가가 꼴찌에 가까운 마라톤 주자에게서 육친애적이고, 새로운 희열을 동반한 감동을 느낀 이유를 추적해 보면 바로 현실에 대한 불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점점 파인 플레이가 귀해지는 건 비단 운동 경기 분야뿐일까. 사람이 살면서 부딪치는 타인과의 각종 경쟁, 심지어는 의견의 차이에서 오는 사소한 언쟁에서까지 그 다툼의 당당함, 깨끗함, 아름다움이 점점 사라져 가는 느낌이다."
마라톤 주자를 보기 전 작가는 이와 같은 현실에 대한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환호와 갈채를 발산할 어딘가를 찾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의문은 가능하다. 작가가 1등이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면 1등에게 보내는 갈채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마라톤에서 1등이 지름길로 온 것도, 반칙을 쓴 것도 아니며, 1등도 1등을 위해서 고통스럽고 정직하게 달려왔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1등에게는 모두가 갈채를 보내기 때문에 굳이 작가까지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대신 작가는 꼴찌로 오는 마라톤 주자에게서 "너희는 개 돼지로 그냥 살아"라고 말하는 세상에 맞서서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발견하고 환호하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한 꼴찌는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남들이 안 된다고 할 때 삭발도 하고, 밤늦게까지 특별 훈련도 하면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꼴찌는 갈채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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