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향욱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취중 진담'(?)이 세상을 한바탕 뒤흔들었다. '신분제 공고화'와 '민중은 개'돼지'라는 내용의 발언은 나라 전체를 분노로 활활 타오르게 했다. 발언을 한 장본인은 나름의 변명도 있을 것이고, 그런 생각을 품게 된 배경과 그런 발언을 내뱉게 된 계기도 있을 것이다.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본인의 뜻이 그런 게 아니라, 세상이 하도 개탄스럽다 보니 '말도 안 되는 해결책'이랍시고 한 번 떠들어봤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당시 같은 자리에서 이 발언을 들은 기자들은 다시 한 번 진위를 확인했고, 결국 본인 의사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 공무원의 발언에 대해 이처럼 온 나라가 분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포함한 99%를 개'돼지라고 불러서 화가 난 것일까? 신분제를 도입한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속한 계층이 평민이나 하급민에 속할까 봐 두려워서일까? 발언한 당사자가 뭐라고 지껄이건 간에 우리는 개'돼지가 아니며, 신분제가 도입될 일은 더더욱 없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별 미친 작자가 비싼 술 먹고 헛소리해댔다고 욕을 퍼붓고 끝낼 수도 있는 문제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치밀어 오른다.
당장 공직사회에서 내쫓고, 두 번 다시 공직자뿐 아니라 어느 누구도 비슷한 발언을 내뱉지 못하도록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닌 것 같다. 이유는 이번 발언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말이어서다. 한국은 이미 매우 공고한 신분제 사회다.
서울대 학생들 사이에도 계층이 존재한다. 일반고 출신과 전국 단위 자사고, 특목고, 외국어고 출신은 서로 경원시한다는 보도를 접했다. 같은 학교, 같은 학과에 다니니까 말도 섞고 인사도 건네지만 그들의 속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고 넓은 강물이 흐른다. 바로 신분 차이라는 강물이다. 미래 한국 사회를 특정 고교 출신이 장악할 것이라는 전망은 이미 수차례 보도된 바 있다. 현 교육제도 아래서 신분을 가르는 강물은 점점 깊어지며 넓어지고 있다. 강 건너 1%가 산다는 세상에 가고 싶지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들에게 그 강은 태풍이 휘몰아치는 거대한 바다처럼 여겨질 터이다.
한 달에 수백만원씩 과외비를 쓰는 집의 자녀와 학원 한두 곳 다니는 것도 부담스러운 집의 자녀가 똑같은 교육의 혜택을 누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죽으라고 공부해서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학에서 장학금까지 받고 졸업하고, 좁디좁은 취업의 문을 가까스로 통과하면 월급쟁이가 될 뿐이다. 결국 기업을 물려받는 것은 오너의 자녀이고, 그들과의 간극은 갈수록 넓어진다.
유사 이래 신분 차이가 없었던 적은 없었다. 근대 시민사회가 도래하고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 의미가 희석됐을 뿐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더욱더 그러했다. 희망도 있었다. 열심히 노력하면 사회의 주역이 될 수 있었고, 그런 세대들이 근대화를 이끌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 번 꿰찬 자리를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적'제도적 수단을 동원해 '그들만의 리그'를 다지고, 그런 '내부자들'의 범주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세상을 바꾸고 있다. 99%의 국민이 1%의 능력과 노력을 존중해 세상을 이끄는 자리에 잠시 앉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더니 이제는 그 자리가 자기 것이니 결코 넘보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배려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영화 속 대사는 그들에게 딱 맞는 말이다. 정치'경제'사회적 리더로서 나름의 역량을 발휘해 우리나라 사회를 발전시켜 달라고 자리를 맡겨놨더니 뒤늦게 '우매한 개'돼지들' 운운하며 '지금껏 먹고살게 해준 게 누군데?'라며 눈을 치켜뜬다.
개탄스러운 것은 그나마 갈수록 고착화하는 신분제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것이 교육이라고 믿고 있는데, 문제의 발언을 한 사람이 바로 백년대계 교육의 정책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는 점이다. 정말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표현이 조금 달라질 뿐 같은 맥락의 발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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